[사설] 홍범도 장군 유해 귀환, 진정한 광복 계기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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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영웅’ 홍범도 장군이 광복절인 15일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장군의 유해는 16~17일 추모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장군이 서거한 1943년으로 따지면 78년 만이요,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1920년으로는 101년 만이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이역만리에 묻힌 장군의 유해를 이제서야 거두게 돼 후손으로서 면목이 없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우리 정부가 카자흐스탄에 묻힌 유해의 귀환을 추진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1년가량 연기된 사정이 있다. 이제라도 광복을 향한 장군의 뜻을 되살리고 해외에 흩어진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남북한으로부터 소외받았던 장군의 행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광복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서거 78년 만에 15일 고국의 품으로
해외 독립운동 자취 발굴 박차 가해야

홍 장군은 일제강점기 의병 투쟁에 몸을 던진 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올라 간도와 극동 러시아에서 일본군을 토벌한 ‘독립전쟁의 전설’이다. 특히 두만강변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상처를 입힌 봉오동 전투는 독립전쟁사의 기념비적 전투로 꼽힌다. 동아시아 최강인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무장투쟁의 첫 승리는 김좌진 부대와 연합한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됐다. 항일 무장투쟁과 독립군 양성을 이끌던 장군은 소련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 땅을 밟았고 곡절의 삶을 살다가 광복을 2년 앞두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동안 장군이 냉전 구도 속에서 남북한으로부터 동시에 외면받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소련군 일원으로 싸우고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레닌의 선물까지 받은 이력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북한도 김일성과 비교될 수 있다는 이유로 장군을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장군의 유해 봉환 문제가 제기됐는데, 북한은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란 점을 들어 연고권을 주장하며 장군의 유해가 남한으로 가는 걸 막았다. 그렇게 남북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에 장군의 유해는 이역만리에서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낡은 시대의 대립적 시각을 뛰어넘는 일이다. 장군은 분단되기 이전의 조국 독립을 위해 일평생 온몸을 던졌다. 이런 민족적 관점은 난맥상에 빠진 남북 관계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꼬여 있는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립운동의 뜻을 되살려 올바른 역사적 자긍심을 갖는 일은 진정한 한·일 관계 정립에 꼭 필요하다. 이제 장군의 유해 봉환을 계기로 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과 발자취를 찾는 일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독립 영웅들을 조국으로 모시는 일은 국가와 후대의 마땅한 책무다. 광복이 된 지 어느새 76년이나 흘렀지만 광복절이 던지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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