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피란민, 완월동 유곽에서 거주” 첫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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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부산 서구 충무동 일대 미도리마치(綠町·녹정) 전경. 1947년 미 군정 때 공창 폐지로 ‘완월동’으로 불렸다. 부산 중구청 제공

한국전쟁 당시 부산 서구 성매매 집결지인 완월동 유곽이 피란민 거주지로 활용됐다는 구술 증언이 나왔다. 피란 수도 부산시의 피란민 수용 정책에 성매매 업소가 이용됐다는 첫 기록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부산시와 국립부경대학교 ‘피란 수도 구술 채록 사업단’은 13일 제2차 시민강연회 ‘피란 수도 부산의 구현-구술자료로 본 기억’을 온라인으로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완월동에 거주했던 피란민의 구술 증언 내용과 함께 부산시가 유곽을 활용해 피란민을 수용했던 정책의 근거가 되는 옛 기사 자료 등이 공개됐다.

‘피란 수도 사업단’ 강연회서 공개
“언니, 밤에 오빠 못 나가게 감시
다른 가족과 1953년까지 지내”

부산시 황경숙 문화재위원의 ‘피란 수도 부산, 완월동 피란민 거주지와 천체산 농축개발대’ 발표에 따르면 구술자인 1930년 대생 김 모 씨는 1950년 부산으로 피란 와 1952년부터 1953년 사이 완월동의 한 유곽에서 거주했다. 김 씨는 당시 완월동 유곽 1채가 피란민 거주지로 활용됐다고 진술했다. 유곽 1층에 피란민 4~5가구, 2층에 약 9가구가 거주했으며, 북한에서 내려온 러시아인 가족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유곽을 중심으로 성매매가 만연하자 이곳에 거주하던 피란민끼리 서로의 자녀를 지키기도 했다는 진술도 있었다.

김 씨는 “밤이 되면 음악 소리가 들리고 여자들이 옷 벗고 길거리 나가서 호객 행위하고 그러니까 우리 언니가 오빠들 못 나가게 감시했다”고 증언했다.

완월동 유곽에 피란민을 수용한 정책의 배경에는 1950년에 개정한 ‘피란민 수용에 대한 임시 조치법’이 있다. 해당 법 제2조와 제3조는 주택, 여관, 요정에 피란민을 수용하도록 명령할 수 있고, 그때 임대료를 받지 않도록 규정했다. 또 다른 조항에서는 이 같은 규정을 위반하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1951년 6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부 완월동 유곽에서는 피란민을 받지 않으려고 방마다 하녀를 넣어 두고 이미 피란민 포화 상태인 척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김 씨의 구술 증언은 피란 수도 당시 피란민 수용과 구호 정책의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깊다. 다만 완월동이 피란민 거주지로 활용된 기간과 임대료 무상 등 법 준수 여부는 구술 기록만으로 알기 어려운 한계로 남았다. 피란민 구술 채록 사업은 부산시가 ‘피란 수도 부산’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벌이는 사업이다. 당시 피란 생활을 보여 주는 유산을 추가하고 보존 관리 계획 등을 수립해 조건을 충족하라는 문화재청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피란 수도 부산의 역사 한쪽을 차지한 ‘완월동’이 있는 서구 충무동 일대에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이곳 재개발추진준비위원회는 5월 서구청에 주거환경개선지구 해제 동의서를 제출했고, 서구청은 주거환경개선지구 해제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주거환경개선지구가 해제되면, 이곳을 재개발 지구로 다시 지정할 수 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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