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불로 망하고 불로 흥하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유럽인문학기행-영국]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영국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18세기 초반에 만들었으니 벌써 300년을 넘은 건물이다. 이 대성당은 특이하게도 ‘불’과 매우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불 때문에 무너졌고, 불 덕분에 더 새로운 건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런던 대화재

1666년 9월 2일 퍼딩 거리에 있는 한 빵가게에서 불이 났다.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고 주변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깜짝 놀란 런던 소방 당국은 발화지 주변 주택 수십 채를 미리 부숴 방화선을 설치함으로써 화재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당시 런던 시장이던 토머스 블러드워스 경에게 방화선 설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블러드워스 시장은 서둘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부숴야 하는 주택들 중에 당시 저명한 귀족, 의원 등의 주택이 다수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장이 주저하는 사이 화재는 인근의 목조 건물들을 타고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더욱 확산돼 런던 시내 쪽으로 향했다. 악명 높은 ‘런던 대화재’의 시작이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불이 처음 시작된 곳에서 수백m 떨어져 있었다. 목사와 신도들은 처음에는 빵집에서 불이 난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며칠 동안 이어진 화재는 마침내 세인트 폴 대성당에까지 이르렀다.


작은 목조 건물들만 집어 삼키느라 배가 고팠던 것인지 불길은 당시 런던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인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고 침을 꼴깍 삼키더니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대성당의 목조 부분을 타고 불길은 엄청나게 솟았고, 천장과 첨탑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역사학자 존 에블린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석조물은 수류탄 파편처럼 날아다녔다. 녹아내린 납 물은 도랑처럼 시내로 흘렀다. 주변의 거리는 마치 은이 깔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화마는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집어 삼키고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람을 타고 더 달려 마침내 화이트홀 거리에 있는 찰스 2세 국왕이 살던 궁전까지 위협하게 됐다. 국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다른 곳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소방당국은 궁전 인근에 방화선을 제대로 설치한데다 강하게 비바람이 불어 화재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대화재는 런던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주택 1만 3200가구가 전소됐고, 교회와 성당 87개가 사라졌다.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끝없는 수난

세인트 폴 대성당이 화재로 전소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기독교로 개종한 애덜버트 왕 시대이던 7세기 초 로마에서 건너온 사제 멜리투스에 의해 설립됐다. 하지만 개종하지 않은 애덜버트의 아들 에드발트는 왕 자리에 오르자마자 기독교를 쫓아낸다면서 성당을 불태워 버렸다.

7세기 말 무렵 다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에오켄베르트 왕이 원래 자리에 성당을 새로 지었지만 962년 런던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다시 불타버렸다. 여기에 새로 지은 성당마저 1087년 화재로 사라져버렸다. 세 번의 화재가 끝은 아니었다.

‘정복왕’ 윌리엄이 성당 재건 작업을 시작했지만 공사 도중이던 1135년 불이 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성당을 완공하는 데에는 200년이나 지나야 했다. 성당은 1240년에야 겨우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증축, 확장됐다.


■다시 성당을 짓다

1666년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세인트 폴 대성당은 황폐해진 상태였다. 첨탑이 1561년 번개에 맞아 부서지는 등 곳곳은 훼손돼 있었다. 게다가 대성당 안팎은 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영국 내전 중에는 의회파 군인들이 잠을 자거나 말 보호하는 막사 노릇을 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무관심했던 런던 사람들은 화재로 대성당이 전소되자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들은 대성당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게 됐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너무 무관심했어. 대화재가 발생한 것은 하나님에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벌을 주신 거야!”

영국 역사상 최고의 건축 전문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시 서른세 살이던 크리스토퍼 렌이었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그는 그 무렵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렌은 대화재가 일어나기 10일 만에 망가진 런던을 완벽하게 재건할 계획안을 찰스 2세 국왕에게 제출했다. 마치 대화재로 런던이 풍비박산날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계획안은 방대했다. 런던의 주요 도로와 광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다.


국왕은 그의 계획안을 좋아하지 않았다. 런던의 상인들과 저택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옛 집을 대충 재건하고 장사를 재개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에게는 렌처럼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재건은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런던 재건 사업을 담당할 적임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3년 뒤 렌을 다시 불러 총책임자 자리를 맡겼다.

사실 렌은 대화재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전소하기 5년 전에 이미 대성당 재건 자문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성당에 대해서 잘 알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1630년 이니고 존스가 설계한 대성당 개축 설계도를 손에 들고 있었다.

렌은 세인트 폴 대성당 재건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돔이 원래 서 있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측량을 실시했다. 먼저 인부들에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큰 돌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한 인부가 큰소리로 외쳤다.

“교수님, 여기 돌에 이상한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요?”

렌은 인부에게 가 보았다. 인부는 한 묘비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묘비에는 라틴어로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Resurgam.’

“이 글은 ‘부활’이라는 뜻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나! 하나님께서 이 성전은 부활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남기신 것이야!”


렌은 성당 건설 작업을 직접 꼼꼼하게 살폈다. 돔 위로 끌어올린 바구니에 들어가서, 또 사우스와크에 있는 집에서 망원경으로 인부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를 하루 종일 살펴보았다.

렌과 모든 사람의 노력 덕분에 성당은 1710년 완공될 수 있었다. 길이 200m, 돔 높이 111m로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대업을 마친 렌은 1723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 폴 대성당 측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시신을 대성당에 안치하기로 했다. 그는 새로 지은 대성당에 처음 묻히는 영광을 안게 됐다. 그의 무덤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이 무덤 아래에는 대성당과 도시의 건설자가 묻혀 있다. 크리스토퍼 렌. 그는 90년 이상을 살았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았다. 이 묘를 보는 사람이라면 주변을 천천히 한 번 살펴보라.’

렌 덕분에 재건에 성공했지만 세인트 폴 대성당의 고난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두 차례나 독일군 공습에 시달렸다. 1940년 10월 10일과 이듬해 4월 17일이었다. 첫 공습 때에는 첨탑이 부서졌고, 두 번째에는 마루에 큰 구멍이 생겼다. 대성당이 영국 국민들에게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잘 아는 윈스턴 처칠 총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인트 폴 대성당만은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돔이다. 돔은 대성당뿐 아니라 런던을 상징하는 부분이다. 일부에서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보이지 않는 런던 전경 사진은 있을 수 없다. 돔은 런던 그 자체”라고 말한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는 영국의 주요한 행사들이 열렸다. 영국을 위기에서 구한 넬슨 제독과 웰링턴 경, 처칠 총리의 장례식이 여기서 거행됐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 및 90세 생일 축하행사,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결혼식도 여기서 치러졌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