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정치가 무너지면 법치도 무너진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박동원 폴리컴 대표

정치적으로 타협하고 합의를 위해 노력해야 할 사안을 다수 의석을 무기로 일방적으로 입법 강행하거나, 모든 사안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입법 만능주의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헌법에 기반한 통치, 즉 법치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지만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는 치명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법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권력에 의해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 선거 절차로 집권한 권력도 마음만 먹으면 헌법 테두리 안에서 얼마든지 법치를 무력화할 수 있다.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는 행정명령 강화, 헌법재판소에 여당 인사를 채워 넣고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감사원 등 헌법적 견제기관의 무력화를 넘어 언론마저 장악하는 ‘심판 매수’ 행위가 그렇다.

입법 만능주의 만연 민주주의 위협
인간 행위, 법만으로 제어할 수 없어

법치주의 좋은 반면 한계도 분명
오도된 자기 확신이 반대 의견 막아

교조적 법치 넘어선 좋은 정치 필수
설득과 공론화로 국민 동의 얻어야


20대 총선 이후 역대급 여대야소는 법치의 위기를 불러왔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견제하고 다수당 일방의 입법을 막기 위해 암묵적으로 합의한 ‘법사위원장 야당 몫’ 규범도 멈춰 섰다. 공수처법, 임대차 3법, 역사왜곡방지법, 의료법 개정안에 이어 최근 언론중재법 개정안까지 이견과 반대를 배제한 채 강행되고 있다.

법학자 고 박세일 교수는 20년 전 한 칼럼에서 법치주의는 통치권자의 자의적·재량적 권력 행사를 억제하는 ‘법의 지배’, 법률주의는 법의 내용과 집행 방식을 묻지 않고 법대로만 처리하는 ‘법에 의한 지배’라고 규정했다. 법치주의는 헌법에 근거한 통치인 데 반해, 법률주의는 법을 통치자의 신념과 의사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법치가 확립되기 이전 국가는 군주의 자의적 인치로 다스려졌다. 이 자의적 인치는 법치 확립으로 극복되었다. 공정한 법치로 백성은 단합되고 나라는 안정되면서 강건해졌다. 중국 춘추시대 각 나라에서 개혁을 주도했던 이들은 법가(法家)였다.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통치하고, 잘 통치 받는 행위’를 이상적인 정치라 했다. 여기서 통치란 법에 의한 통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의 힘은 엄정하고 공정한 법치에서 나왔다.

다만 민주주의에 상응하지 않는 군주의 법치는 군주의 이해와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상응하는 법치도 포퓰리즘에 의한 선동과 다수의 폭정에 의해 무너지곤 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전 대통령은 정적들을 ‘반역자’로 몰며 의회를 해산하고 친정 체제를 강화했다. 에콰도르 코레아 전 대통령은 정권 비판 언론을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궤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해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은 야당과 언론계, 시민사회, 해외의 여러 언론 단체까지 반대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밀어붙인다. 위안부 단체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보호법 개정안’은 발의하려다 ‘윤미향 보호법’이란 비판에 직면하고 폐기됐다.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문 대통령이고, 야당 시절 표현의 자유를 외치던 민주당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법질서 확립’을 기치로 촛불집회 참가자, 광우병을 보도했던 MBC PD수첩 제작진을 형사재판에 넘겼다. 인터넷 허위 사실 유포 혐의 논객 ‘미네르바’도 구속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설사 그런 주장들에 허위가 섞여 있다 해도 법에 따른 처벌보다 ‘진실의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여과되어야 한다는 게 사법부 판단이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법으로 제어할 수는 없다. 인간은 한계투성이고 권력은 반드시 오만해진다. 통치권자의 자의적·재량적 권력 행사를 억제하는 법치주의는 언제든지 수월하고 효율적인 법률주의의 강렬한 유혹에 빠진다. 오도된 자기 확신,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이견이나 반대, 견제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인간 사회는 법만으로 지탱하기 힘들다. 정치적 노력 없이 모든 문제를 법으로 환원하는 입법 만능주의, 대립과 갈등을 사법부에 맡겨 버리는 사법 만능주의는 결국 권력주의로 귀결된다. 사법을 통제하고 입법 권한을 강화할 수 있는 숫자 우위의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집단 양극화로 국민은 갈라져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이렇다.

민주주의에서 법치보다 중요한 건 정치다. 권력은 헌법에 기반한 법치주의에 의해 견제돼야 하고 통치는 좋은 정치에 의해 작동해야 한다.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개혁 대상자를 정치적으로 설득하는 일이다. 통치 권력이 설득과 공론을 통해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정치적 노력을 게을리하면 언제든지 입법 만능의 유혹에 빠지고 법치는 무너진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