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잘 가 봤자 ○○기업”… 자기비하에 길들여진 지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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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지방혐오 리포트] ⑥ 지역민 스스로 폄하

지방혐오가 만연하면서 이제는 혐오의 대상이었던 지역이 스스로 지방혐오의 늪에 빠져 버렸다. 지역민이 다른 지역을 쉽게 폄하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고향에 대한 편견을 더 쉽게 받아들이고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사용하는 빈도와 이에 대해 공감하는 정도도 높았다.

지방혐오를 내재화하면서 스스로 위축되고 자신을 검열하기도 한다. 지방혐오는 개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맞서 싸우기보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적응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방혐오의 어둡고도 슬픈 단면이다.

서울사람보다 더 고정 관념 표출
혐오 표현 속 차별 시선 내재화
맞서 싸우기보다는 적응 선택
수도권 문화 편입 위해 자기검열
정치 세력이 지역 간 혐오 조장도

■지역민이 지방 편견 표현 많이 사용

<부산일보>와 부경대 지방분권발전연구소가 진행한 ‘지역혐오 표현의 실태와 의식 파악을 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울보다 부산 거주자가 부산에 대한 고정관념이 담긴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적으로 혐오 대상이 되는 객체가 관련 표현을 자제하거나 표현 자체를 부정할 것이라는 생각과 반대되는 결과다.

‘경상도 사람은 대체로 무뚝뚝하고 성격이 급하다’는 표현을 ‘자주 혹은 매우 자주 사용한다’고 답한 부산 출신 응답자는 전체 응답자의 24%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해당 표현을 ‘자주 혹은 매우 자주 사용한다’고 답한 서울 응답자는 전체 서울 응답자의 11.2%에 그쳤다.

나아가 해당 표현에 공감하는 정도도 서울 거주자보다 부산 거주자에게서 더 높게 나타났다. ‘경상도 사람은 대체로 무뚝뚝하고 성격이 급하다’는 편견에 ‘약간 혹은 매우 긍정한다’고 답한 부산 응답 비율은 46.1%에 달하지만, 서울의 경우 38.3%로 다소 낮게 나타났다. 해당 표현을 들어본 빈도도 부산 수치(70.4%)가 서울 수치(64%)보다 조금 더 높았다.

전문가들은 혐오 표현 자체가 분노에서 나아가 그 차별적 내용을 수용하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분석한다. 2017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혐오 표현의 실태와 대응 방안’은 “만연한 차별 속에서 혐오를 내면화하고 현실을 수용하며 저항을 거부하게 된다”며 “적극적인 대항을 꾀하고자 하더라도 배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것을 꺼린다”고 밝혔다.

또 지속적으로 혐오 표현에 노출되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차별적 시선을 은연중에 수용하게 된다. 보고서는 배제에 대한 두려움을 강화시켜 혐오 표현은 물론 차별에 대한 저항 능력을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스스로 위축되는 지역민들

능력은 출신 지역이 아닌 성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방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지방 출신들은 수도권 중심의 사회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때로는 혐오나 편견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특히 입시나 채용 등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위치 놓여 있을 때 상황은 더 두드러진다. 지방대학 커뮤니티에 ‘지방’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대학 정도면 갈 수 있는 기업들 이름 적어보자’ ‘우리 대학에서 잘 가 봤자 ○○(기업 이름) 정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 등 스스로 위축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앱인 ‘블라인드’에서도 ‘충분히 기업에서 열심히 하는데 승진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지방 출신이라서 그런가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회사에서 출신 지역 물어보는 데 괜한 편견 심어 줄까 봐 사실대로 말할지 잠시 고민했다’ 등의 경험담이 쏟아졌다.

고향이 전라도인 직장인 김 모(28) 씨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서울에서 살아서 사투리를 쓰지 않아 동료들은 내 출신 지역을 모른다”면서 “굳이 밝혀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해 물어보지 않는 이상 먼저 밝히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경상도 vs 전라도’ 부추기는 정치권

지방혐오의 양상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대립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경상도와 전라도 등으로 대변되는 지방 간 혐오도 심각하다. 대표적인 표현으로 ‘과메기’가 있는데, 이는 전라도 비하 표현인 ‘홍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 홍어와 과메기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즐겨 먹는 생선으로 독특한 향과 맛 때문에 지역민들이 서로를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데 쓰인다. 혐오가 혐오를 낳은 셈이다.

특정 정치 세력이 의도적으로 지역 간 대립과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과정에서 퍼뜨린 것도 많다. 지지자 결속이나 진영 논리를 펴기 위해 혐오를 조장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공적 영역 혐오는 자칫 해당 내용을 주류인 것처럼 포장하고 이를 정당화할 우려가 높다.

부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차재권 교수는 “고위직에 있는 정치인들이 지역혐오 발언을 하게 되면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신념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끝-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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