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찍힌 국산 1호 M16 소총 완성하고 ‘감격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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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인in人] 조병창 1기 엔지니어 강흥림 씨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서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한 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로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공대 졸업 후 설계기사 일하다
훈련 기사 모집에 부산행 결심
미국 콜트사에서 1 대 1 수업
총기 부품 126개 중 16개 맡아
아파트 합숙하면서 1년간 연수
방산업체서 기술 강의 ‘뿌듯’
아들도 대 이어 같은 회사 근무


한양공과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구로구의 한 스프링 제조공장의 설계 기사이던 30대 중반의 강흥림(83) 씨는 1971년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M16 소총 제조공장 도미(渡美) 훈련 기사 모집’ 공고였다. 당시 5대 일간지에 실린, 신설하는 국방부 조병창에서 근무할 기사를 뽑는다는 내용의 광고를 잘 갈무리한 강 씨는 결심했다. ‘그래 부산으로 가자.’

1971년 강 씨는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경쟁자를 이기고 ‘도미 기사’에 당당히 선발됐다. 당시로는 참 생소한 ‘소총 제조공장’은 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오랫동안 준비한 ‘자주국방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현재는 기밀이 해제된 1969년 8월 8일 대통령비서실 문건 ‘M16 및 탄약공장 설치를 위한 차관 교섭’에 따르면 교섭이 잘 진행돼 한·미 정부 차원에서 M16의 한국 생산이 최종 성사되면서 도미 기사 모집이 현실화했다.

강 씨가 잘 다니던 직장에서 이직 결심을 하고 이사까지 하며 생면부지의 부산으로 오게 된 이유가 실은 있었다. “제가 오산고등학교 출신입니다. 독립선언서 33인의 한 분인 이승훈 선생이 세웠고 조만식 선생, 함석헌 선생, 한경직 목사를 배출한 명문이죠. 여기서 민족정신을 배웠습니다.” 강 씨는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자주국방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도미 기사’ 응모에 한 치도 망설임이 없었다고 했다.

“도미 기사 단장은 강영택 대령이 맡아 우리를 이끌었죠.” 강 씨는 함께 선발된 27명과 함께 1972년 3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연수지는 미국 총기 명문 기업 콜트(Colt)사였지만, 우선 도착한 곳은 텍사스에 있는 미 국방어학원(DLI)이었습니다. 여기서 세계 각국에서 온 공군 파일럿과 3개월 언어연수를 받은 후 콜트사로 가서 기술 연수를 했습니다.”

강 씨는 서부시대부터 총기를 만들어 온 노하우를 지닌 콜트사에서 M16 소총에 들어가는 126개 부품 중에 16개 부품을 맡았다. 주로 스프링과 롤핀이었다.

아파트에서 합숙하며 지낸 27명이 도미 기사들은 1973년 1월 귀국해 부산 국방부 조병창에서 만든 국산 시리얼 NO.1이 찍힌 M16을 제작해 드디어 납품했다. “청와대에서 M16을 받아 본 박정희 대통령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듣고 우리 기사들도 감개무량했던 기억이 납니다.” 강 씨는 조병창이 가동되고 6개월쯤 지난 그해 6월 박 대통령이 직접 기장군 철마에 있는 국방부 조병창을 방문해 관계자를 격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 씨는 당시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소총 국산화는 가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병창 간부들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박 대통령은 임진왜란이나 을사늑약이나 한국이 총이 없어서 일본에 수난을 당했다며 국산 총기 개발을 강력하게 지시했답니다”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도미 기사의 부산 귀국으로 국방부 조병창은 유사 이래 첫 국산 소총을 생산한 자주국방의 선진 기지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도미 기사의 선진 기술은 한국 정밀공업 기술을 혁신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강 씨는 기억했다. “1975년부터 경남 창원공단에 방산업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도미 기사들이 강사가 되어 기술 강의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저도 창원공단에 자주 강의를 나갔는데, 감히 우리나라 정밀기계공업의 효시가 되는 역할을 했다고 자부심을 가집니다.”

귀국한 첫해 국가가 제공한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최신식 아파트에서 생활하던 강 씨는 그해 둘째 아들 건형(48) 씨를 낳았다. “조병창 아파트는 최신식이라 모두 부러워했죠. 국가의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강 씨는 1978년 기술을 발휘해 탄환 클립 국산화 공로로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조병창은 1981년 민영화돼 (주)대우정밀로 바뀌었다. 강 씨는 대우정밀 품질관리부장 시설부장 등을 거쳐 1993년 대우정밀 자회사 한국기전(주)의 상무로 퇴직했다.

조병창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들 건형 씨는 아버지를 닮아 어릴 적부터 녹음기 분해 조립을 즐겼다. 건형 씨는 아버지가 자주국방의 염원으로 다녔던 그 회사 SNT모티브(옛 대우정밀)에 1996년 입사했다. 건형 씨는 자동차 계기판 전자 관련 파트에서 일하지만, SNT모티브의 뿌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방부 조병창임을 잘 알고 있다.

부자는 최근 국산 총기 1호 생산지인 SNT모티브 방산공장 입구 ‘정밀조병’ 탑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자주국방의 전사로, 아들은 그 아버지가 닦은 터에서 미래 자동차를 개발하는 엔지니어로 말이다. 50년 전 국방부 조병창의 자주국방 기치는 이제 SNT모티브의 첨단산업으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공동 기획 : SNT Mot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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