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21세기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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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추석 명절 연휴가 끝났다. 이제 추석에 고향을 찾기보다 휴양지를 찾는 이들이 더 많아진 것이 요즘 세태이지만, 추석이 한국 고유의 명절이라는 사실을 알고 외국 친구들이 ‘해피 추석’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인지도도 높아졌다. 정작 한국인들 사이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추석의 의미가 외부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미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추석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져 볼 필요는 있다. 추석을 한가위라고 명명하는 풍습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석이야말로 고대 농경사회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상징이다. 아시아에 대한 ‘각성’을 얻은 이후에 나는 추석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추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곤 한다. 물론 최근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김영민 교수 역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글을 쓰긴 했지만, 나에게 추석은 ‘아시아’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기호이다. 더 이상 농경이 주요 산업도 아닌 한국에서 출처도 불분명한 차례상을 차려서 ‘조상님’께 올리는 일련의 제례를 모더니스트들은 아마 시대착오적이라고 놀릴 것이다.

‘아시아’ 개념은 서양 근대문명의 산물
유럽적 이성의 종언과 맞물린 것
중국의 부상에 따른 새로운 의미 찾아야

물론 이런 문제는 딱히 추석 명절만 해당 사항이 있다기보다, 모든 과거의 풍습에 관련한 문제 제기일 테다. 김동리의 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흥미로운 근대문학이었다. 이때 모더니티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유럽에서 발원해서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 ‘서양 문명’이다. 추석 명절이라는, 신체의 맹장 같은 기호는, 나에게 ‘아시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발신하는 암호에 가깝다. ‘전통’이라고 받아들여진 것들이 사실상 모더니티의 발명품이라는 진실을 깨닫고 난 뒤에 찾아오는 ‘허무’는 20세기 내내 많은 이들을 무너진 공동체를 복원하자는 운동이나 심리의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유럽의 허무주의는 그 반작용으로 강렬한 기원에 대한 열망을 촉발시켰고, 그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폭력들이었다. 당시에 아시아의 지식인들 역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루쉰은 19세기의 결과물인 유럽의 20세기가 그 반작용으로 ‘정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진단했는데, 그의 예언은 파시즘과 소련의 등장으로 타당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체제 모두 19세기의 유럽 이론가들이 예측했던 물질적 합목적성의 과정에서 출몰했다기보다, 그 조건을 뛰어넘고자 출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대표되었던 유럽 정신의 종언을 선언한 발레리나, 아시아의 기술문명화를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유럽 정신의 고양을 주문한 슈펭글러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주창하면서 서양의 문명으로 아시아의 정신을 갱신할 것을 주창한 다케우치 요시미에서 자신들의 거울상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20세기에 출몰한 일련의 흐름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어떤 뚜렷한 정체성이나, ‘아시아’라는 단일대오가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호명 당하는 ‘아시아’는 고대로부터 만들어진 그 상상의 이미지로 유령처럼 불려 나오곤 한다. 코로나 팬데믹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방역 조치를 ‘유교의 잔재’에서 찾는 분석은 그 일단의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이 상상하는 그 ‘아시아’ 역시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을 아시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루쉰의 말처럼, ‘아시아’의 역사는 20세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이 코로나 방역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까닭은 사스나 메르스처럼 이미 국지적인 팬데믹을 많이 겪었고 그에 대한 국가 방역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선 바이러스의 전파 역시 아시아가 미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20세기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의 생산과 물류를 담당했던 세계의 공장으로 아시아가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아시아를 전염병에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 낸 것이고, 향후에도 이런 양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홉스봄은 에서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기점으로 ‘단기 20세기’라는 시대 구분을 제시했다. 왕후이는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된 에서 중국을 21세기의 문제로 부각시켰다. 나는 여기에 이 중국의 문제는 곧 아시아에 대한 질문이라고 덧붙이고자 한다. 이른바 미국의 부상과 함께 도래한 ‘태평양 시대’의 개막이 20세기의 시작이었다면, 중국과 아시아의 부상은 21세기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각 변동을 재조정하기 위한 지정학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과연 21세기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준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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