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으로 소환한 ‘물장구 치던 시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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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김준호와 전통예술가 손심심은 부부다. 이들은 2000년대 초·중반 활발한 방송 활동으로 꽤 유명했다. 특히 국악과 우리 것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특유의 입담으로 KBS1 ‘TV쇼 진품명품’ 출장 감정위원으로, ‘6시 내 고향’ 리포터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을 보면, 참 많은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느낀다.

이번엔 이들 부부가 글과 그림으로 그 재주를 뽐냈다. 최근 출간된 문화인류학적 탐사기 (학이사)의 글을 김준호가 쓰고, 손심심이 관련 삽화를 그렸다. 김 씨는 현재 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지신밟기 예능보유자며, 손 씨는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승 교육사, (사)문장원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준호·손심심 부부가 펴낸
‘바늘 같은 몸에다가 황소 …’
국악인 김 씨, 문물 기록하고
전통예술가 손 씨, 삽화 그려

김준호는 국악인으로 살며 역마살이 낀 것처럼 바람에 실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그게 40년이었다.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해석해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로 한 손에는 펜을, 한 손에는 장고 채를 들고 걸었다. 지역의 소리와 풍물을 탐구하기 위해 걸어온 길은 기록이 되었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어느새 사라져 버린 풍물과 문물이 눈에 밟혔다.”

가볍게 풀어내는 추억과 노랫말에 이제는 인생이 되어버린 민속학, 여기에 인류학, 언어학을 더하고 부인이자 춤꾼 손심심 씨가 직접 그린 20여 장 삽화가 꾸며져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다. 손 씨는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증곡 천재동 선생님으로부터 그림 조언을 듣고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저자는 “과거의 잔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옛 기억을 타령, 민요 등 노래가 들리는 글쓰기로 맛있는 밥상을 차려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의 가을 운동회, 엿장수와 아이스께끼, 참새 쫓기, 지게 이야기 등 우리가 망각창고에 구겨 넣은 소년기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거둔다’는 말에서 유래된 가을. 이맘 때의 가을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죽하면 죽은 송장도 꿈지럭하고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속담이 생겼겠느냐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경운기도 없던 시절, 나락 베는 일부터 타작까지 일일이 손이 들어갔다. 목매라 부르는 통나무에 볏단을 때려 탈곡하다 홑태로 일일이 훑는 방식을 거쳐 게롱게롱 소리가 나는 인력 탈곡기에서 발동기 탈곡기까지, 저자의 할아버지는 그 모든 변화를 거쳐 가며 나락 타작을 해왔다.

볏짚으로는 덕석도 만들고, 가마니도 짜고, 새끼줄도 만들고 지붕도 이었다. 선조들은 짚 위에서 태어나 짚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짚을 신성시 했다. 산모와 아기를 이어주는 탯줄도 짚과 동일시하여 짚으로 꼬아서 만든 줄은 자식을 부르듯이 새끼라고 이름 붙였다. 풍작을 빌던 정월 대보름 대동 놀이에 빠지지 않는 줄다리기에 쓰인 새끼줄은 재수가 좋다고 서로 떼어가려 했다.

저자의 고무신 얘기는 ‘물장구 치던 옛 추억’을 소환한다. 저자 어린 시절에는 방수성이 뛰어난 고무신은 흙 놀이용 불도저가 되기도 하고, 올챙이를 담는 어항이 되기도 했다. 급증하는 수요에 따라 들어선 고무공장에서 노동을 착취당한 여공들의 파업 얘기도 전한다. 하지만 고난의 시기를 함께했던 고무신도 20세기 말과 함께 사라졌다.

저자 김준호는 “산골 방 안의 벽난로 고콜, 양은 도시락 얹어 눌은밥 긁어먹던 조개탄 난로, 근대 세일즈 우먼의 개척자였던 아모레 아줌마, 잡지 샘터와 리더스 다이제스트처럼 추억 속에만 남은 풍경은 이미 사라져 버린 문물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이끈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빠르게 변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많은 근대 문물은 사라져 우리의 추억에만 남았다.

책은 사회 격동기를 살아내며 전통 문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근대 풍물과 함께하며, 마침내 현대 문물로 모두 바뀌는 과정을 겪은 사람의 추억 이야기이다. 어떤 이에게는 잊은 줄도 모르고 지내던 것들에 대한 향수가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뉴트로 문화로 나아갈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저자의 발품으로 가득 채운 기억과 기록의 곳간이다.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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