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영 케어러(Young Ca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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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 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2인분의 삶을 담당하는 가장이 됐다. 돈, 일, 질병, 돌봄이 자주 나를 압도하거나 초과했다. 주위에서는 효자로 부르기도 했다.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인데….” 치매에 걸린 50대 아빠의 보호자로 살아가는 청년 조기현 씨가 쓴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 씨처럼 병든 부모나 조부모를 부양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우리 사회에 이 같은 개념이 없어 실태조차 파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는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코올 및 약물 의존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아동이나 젊은이를 ‘영 케어러(Young Carer)’라고 부른다. 1980년대 말 영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용어다. 영국은 2016년 기준으로 70만 명에 달하는 영 케어러에게 각종 지원을 하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생애주기에 따르는 과업들을 돌봄으로 인해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창 진학이나 취업, 결혼을 준비해야 할 때 가족의 부양을 맡게 되면 자신의 미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없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돌봄을 지속하다 사회적인 고립은 물론 노년기에 절대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지고 만다.

부산 중구가 전국 최초로 영 케어러를 대상으로 ‘돌봄 제공자인 아동·청소년 지원 조례안’을 지난 16일 제정했다. 대표 발의자인 김시형 의원은 “아동·청소년들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부모화’는 과도한 부담감으로 자존감을 낮추고 학업이나 꿈을 포기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시기임을 감안하여 교육 기회를 확보하고 심신의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년소녀가장과 다를 바 없는데 별도의 분류가 필요한지 묻는 사람도 있다. 소년소녀가장은 UN의 권고에 따라 사라지고, ‘소년소녀가정’이라는 말이 생겼지만 아직도 생소하다. 게다가 부양 능력이 없더라도 부모와 동거 중이면 대상에서 제외된다. 소년소녀가장은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오늘날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효자 효녀’도 돌봄을 개인의 됨됨이에 따라 맡기는 식이라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에 제정된 조례 3조 2항은 “다양한 주체가 서로 연계하여 돌봄 제공자인 아동 청소년이 고립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다. 공정과 공평이 시대의 화두라면 이들에게 범국가적인 지원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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