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26. ‘앉은키밀’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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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시각이나 청각 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다른 감각기관이 더 발달한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서 본 글인데, ‘장애를 앓는’은 손봐야 할 표현이다. 장애는 단지 불편할 뿐인데, 질병처럼 생각하게 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뇌성마비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문장에 나온 ‘장애에도 불구하고’도 쓰지 않아야 할 표현이다. 동정이 담긴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들은 단지 차이가 있을 뿐인 장애인을 차별하는 길로 잘못 들어서기 쉽기 때문에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피부색, 출신지, 빈부, 성별이나 장애에 따른 차별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인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질 낮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어권에서도 ‘policeman→police, chairman→chairperson, fireman→firefighter’식으로 말을 바꾸는가 하면, 2016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니그로’뿐만 아니라 ‘오리엔탈’도 연방 법규나 공식 문서에서 쓰지 못하게 하는 법안에 서명하기도 했다.

2018년 서울시도 시민 제안을 받아 심사를 거쳐 ‘성평등 언어사전’을 발표했다. 저출산은 저출생, 유모차는 유아차, 미혼은 비혼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이후 서울시는 해마다 성평등 언어사전을 발표하는데, 학부형은 학부모, 자(子)는 자녀, 미숙아는 조산아, 자매결연은 상호결연으로 개선하자고 제안했다. 이미 2012년에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기도 한 ‘잡상인’을 ‘이동상인’으로 바꾼 적 있는 서울시의 언어·인권 감수성은 높이 쳐줄 만하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이런 부분에서 좀 느린 듯하다. 이를테면 시중에서 이미 널리 퍼진 ‘엄지장갑’ 대신 아직도 ‘벙어리장갑’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려놓았다.(그나마 열린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는 올라 있으니 다행이랄까.) 그런가 하면, ‘소보로빵’ 대신 ‘곰보빵’을 쓰라고 하고 있으니…. 아시다시피 곰보는 ‘얼굴이 얽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올해 4월 장애인인권법센터 대표가 농업진흥청에 편지를 보냈다. 농진청 누리집(홈페이지)에 나온 토종 밀 이름인 ‘앉은뱅이밀’은 장애인 비하 표현이라며 바꿔 달라고…. 지체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이 표현을 보고 가슴 아파한다는 사연도 함께였다. 이에 농진청은 즉시 누리집에서 이 말이 검색되지 않도록 했고, ‘앉은키밀’이라는 대안도 찾아냈다. 벌써, 눈 밝은 사람들은 ‘앉은키밀’을 적극적으로 쓰는 판이다. 여러 빵집이나 농장뿐만 아니라 한살림생협도 ‘앉은키밀’을 쓴다. 이런 재바름이나 언어·인권 감수성은 국립국어원이 좀 배웠으면 싶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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