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제왕적 대통령’ 시대는 저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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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대통령감이 없다.” 내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향한 정치권의 움직임이 분주하지만 주변의 여론은 좀 심드렁한 것 같다. 여야 경선 후보들을 아무리 살펴도 마땅한 인물이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들이 많다. ‘왕후장상이 씨가 있나’ 싶다가도 일국의 운명을 맡기기에는 영 마뜩잖다는 표정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짜인 경선판을 뒤엎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고 하소연한다.

‘제왕적 대통령’ 시대가 저무는 인상이다. 제왕의 아우라를 풍기는 대선 후보는 이제 찾기 어렵다. 하늘이 내린 듯 전지전능과 무오류의 카리스마를 뿜으며 만기친람(萬機親覽) 천하의 정사를 돌보는 초인은 더는 없다. 경선의 선두를 달리는 여야 후보들을 보자면 여차하면 청와대 안마당이요 아니면 감옥에 떨어질까 싶을 정도로 ‘대장동 게이트’ 혹은 ‘고발 사주’ 담벼락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다. 게다가 만기친람은커녕 세상 물정 모른다는 듯 연방 말실수를 거듭하거나 여배우 스캔들로 점이 있느냐 없느냐 ‘허리하학적 논쟁’이나 부른다. 누가 덜 나쁜가, ‘도토리 키 재기’로 가는 양상이다.

대선 경선판 “대통령감 없다” 회자
여야 주자들 도덕성·자질 입길 올라
차기 대통령 권위 약화 불 보듯

분권형 대통령 등장할 절호의 기회
비수도권 연대해 균형발전 전략 짜야
지방분권형 개헌, 차기 정부 과제로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t)은 기실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 나온 말이다. 1973년 역사학자 아서 슐레징거가 저서 <제국의 대통령직>에서 입법부 사법부 위에 군림한 닉슨 대통령 행정부의 막강한 권력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국내에서는 분단 체제 아래 대통령 중심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곧잘 인용됐다. 나아가 오랜 왕조 시대의 영향으로 ‘대통령= 하늘이 내린 권력자’라는 인식이 파고들면서 대통령의 권위는 제왕의 그것 못지않게 날이 시퍼??다.

권력과 권위의 집중 건너편에는 권력과 권위의 분산이 있다. 제왕적 대통령에 맞선 ‘분권형 대통령’이다. 전지전능과 무오류의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면 권력과 권위의 집중은 되레 국가의 위기를 부를 뿐이다. 특히 도덕적 신뢰가 흔들리는 것은 대통령 리더십에 심대한 타격을 준다. 내년 대선이 지금의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분권’은 필연적으로 다음 정권의 시대정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김두관의 실패는 뼈아프다. ‘서울공화국 해체’를 외치며 서울이 아닌 부산에 공식 선거사무소를 개설한 뒤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의 기치를 높이 든 그에게서 ‘제왕적 대통령’ 그 이후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이 김두관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부울경의 유일한 여권 대선 주자로서 경선 완주를 외쳤던 그가 정치적 기반인 PK에서의 경선을 앞두고 돌연 사퇴한 것은 전혀 자치분권 균형발전 전도사답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두관의 실패가 지방의 실패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지방소멸의 수도권 일극주의냐 자치분권의 국토균형발전이냐, 20대 대선은 지방의 명운이 걸린 건곤일척의 전장이다. 지방소멸의 물줄기를 균형발전으로 돌리는 획기적인 계기를 이쯤에서 마련하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뿐이다. 수도권 인구가 국내 인구의 절반을 넘긴 데다 지난해 4월 21대 총선에서 비수도권 유권자 수가 2194만 8494명으로 수도권(2204만 5753명)에 역전당하기 시작했다. 정치 지형 변화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바탕으로 지방을 살릴 전략과 전술을 짤 때다.

다행히 최근 들어 지방에 서광을 비추는 낭보가 잇따르고 있다. 수도권 150곳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기관 2차 이전이 올가을에는 가닥이 잡힐 것이라는 정부 방침이 전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2년 대선 공약 ‘신행정수도’도 현실화의 길을 열었다. 국회의사당 분원을 세종시에 설치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지난달 28일 통과됐기 때문이다. 같은 날 지방재정에 숨통을 틔워 줄 ‘고향사랑 기부금법’도 국회 문턱을 넘어 2023년 1월 1일 시행에 들어간다.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의 계절을 맞아서야 비로소 지방 살리기 정책이 속속 등장하는 것 같아 심히 유감스럽지만 그나마 선거를 거치면서 조금씩 지방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런 정치권의 움직임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방 유권자의 단합된 힘이야말로 수도권 일극주의를 해체하고 지방소멸을 막을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 말이다.

지방은 이번 대선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이 물러나고 분권형 대통령을 맞을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대통령과 중앙정부에 쏠린 힘을 삼권분립과 국토균형발전 정신에 맞게 입법·사법부와 지방정부 등에 골고루 나누어야 한다. ‘지방분권형 개헌’은 마지막 퍼즐 맞추기가 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사라진 시대, 분권이야말로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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