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고전 통찰하며 ‘삶의 문제’ 인문학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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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을 걷다 / 하창수

<책 속을 걷다>는 부산에서 지역문학 운동이 일던 1980년대 무크지 <지평>을 통해 평론 활동을 시작한 하창수(66) 문학평론가의 인문학 산문집이다. 열 번째 책으로 그의 평생 인문학적 공부의 무게가 담긴 저작이다. 부제는 ‘통찰의 자취를 찾아’다. 동서고금의 통찰을 종횡하면서 보편적인 문제, 즉 인간과 만물, 삶과 죽음, 선과 악, 정통과 이단, 분리와 합일, 머리로 살기와 가슴으로 살기 등 38가지 항목을 천착한다. 그를 만나 책의 내용을 풀면서 문답했다.


삶과 죽음·선과 악 등 38개 항목 천착
‘인간이 만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인간 내부의 위계를 만들 수 있어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그를 추구·지향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가.

“농경사회 이후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물 중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을 주저 없이 표명했다. 그전 수렵 채집 단계에서 인간은 다른 동식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이 그렇다. 그런데 희한하다. 젊은 시절에는 휴머니즘의 기치를 높이 들지만 대개들 인생을 살아보면 ‘인간은 별것 아니더라’고 말한다. 인간의 위치가 그렇게 우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다. 인간이 만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인간 내부의 위계를 만들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유가, 서구 계몽철학의 휴머니즘은 인간을 맨 앞에 놓는다. 그러나 열자 장자 스피노자 등은 ‘자연과 나는 하나’라고 여긴다. 조선시대 인물성동이론에서 낙론계 동론(同論)의 홍대용도 인간과 만물은 다르지 않다고 봤다. 동학의 최시형도 인간과 만물을 다 같이 섬겨야 한다고 했다. 그게 생태·녹색 사상으로 이어지는 거다. 어쨌든 인간은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공자는 ‘도덕’과 ‘명분’의 관점에서 역사를 봤으나 사마천은 ‘경제’와 ‘경세’도 역사 안에 끌어들였다”며 “인간사는 선(善), 인(仁), 충(忠)에 의해 도덕적으로만 영위되는 게 아니라, 악(惡) 불인(不仁) 사(詐)도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했다.

-이상/도덕과 현실은 어떠한가. 이상/도덕은 높고 현실은 진부한가.

“현실과 인간의 실상을 무시해서 안 된다는 입장이다. 공맹이나 주희는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관자 한비자 이탁오는 현실주의자였다. 한나라는 치국 방략으로 외유내법(外儒內法)을 채택했다. 밖으로는 유가의 이상을 내걸고 안으로는 법가의 현실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상주의, 도덕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 본능과 어긋나고, 당위를 내세워 좋음보다 옳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서 최대 걸림돌은 철저하게 탐구한 것이 아니라 경시·무시한 것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준비된 것에서가 아니라 대비하지 않은 것에서 발생한다.”

-신은 무엇인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존재로 인정한 게 둘인데 그것이 ‘신’과 ‘자연’이다. 탈무드와 스피노자의 가르침대로 자연이 곧 신이다. 시몬 베이유는 “우주는 우주의 아름다움 그 자체 외에는 아무런 합목적성을 띠지 않는다. 우주에 합목적성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우주의 본질적 진리다”라고 했다. 본회퍼는 “인간의 부름에 화답하는 신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본디 신이나 자연에는 인간을 위한 합목적성이 없는 것이 본질이다”라고 했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이고, 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다시 시몬 베이유를 언급한다. 그는 설령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사랑하리라 했다. 존재하기 때문에,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향함으로써 올바른 행동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부재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에게는 머리와 가슴이 있다고 한다.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디오니소스적 힘이 원본이라면 아폴론적 질서는 복사본이다. 예술에서 음악과 춤은 가슴의 것이고, 문자와 언어는 머리의 것이다. 희랍인 조르바는 가슴과 몸으로 세계와 인간을 관통하고자 했다. ‘가슴’에게 세상은 늘 새로워 경이롭지만, ‘머리’에게 만사는 그게 그거라서 귀찮다. ‘최후의 인간’이 아니라 ‘최초의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초의 인간이 더 끌린다.”

그는 세계와 삶에 대해 말했다. “세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고, 냉혹하거나 불합리한 것도 아니며, 완전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이, 인간의 삶도 외부의 신적인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필연과 업에 의해 운행될 뿐이다. 삶의 나그네에게 목적지는 없다. 오직 지나가는 것이며,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현세의 일회적인 삶, 일원적인 삶만이 유일한 것이고, 인간은 특별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보다 더 큰 자연이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무엇이 인간의 궁극인가.

“아니다. 없다고 허무한 게 아니다. 외려 더 추구해야 한다. 사람의 가치는 타인들과 어떻게 접촉하고, 다른 생명체와 어떤 관계를 쌓으며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얼마만큼 마음을 졸였는가로 결정된다. 동학이 제시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하창수 지음/전망/408쪽/2만 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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