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집서 체온 나누는 우리는 한 가족… 떳떳하게 세상 밖으로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우리도 가족입니다] 1. 가정 밖 아이들 둥지 ‘그룹홈’

부산 사상구의 한 그룹홈 모습. 아이들의 성장일지와 계획표가 걸려있다. 이곳에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7명이 모여 일반가정 형태로 생활한다.

“여기서 나가면 너희가 다 형제고 자매다, 그렇게 얘기하죠.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가족’ 아닐까 생각해요.”

지난 5일 오후 기자는 부산 사상구의 한 그룹홈을 찾았다. 그룹홈은 부모의 학대, 빈곤, 사망 등 가정이 붕괴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동복지시설이다. 최소 5명에서 많게는 7명까지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1~2명의 사회복지사가 24시간 상주하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대규모 아동양육시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이기위해 아동 개개인을 돌보는 가정 형태가 부각되면서 지난 2004년부터 아동복지시설로 인정받았다.

가정 붕괴 아동·청소년 함께 거주
사회복지사 상주하며 부모 역할
새로운 가족 형태 자리매김 불구
그릇된 편견·제도 미비에 ‘눈물’
정부 가족정책 개편 추진 ‘희망’

전달받은 주소를 수소문해 찾아갔지만 ‘그룹홈’이라고 적힌 문패는 없었다. 직접 아파트 앞까지 마중을 나온 부산시 아동청소년그룹홈협회 협회 이은희 회장은 “학대 부모가 혹여 주소를 보고 찾아올 수 있어 그룹홈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관에 들어서니 크기가 제각각인 슬리퍼와 운동화, 구두가 즐비했다. 화장실에는 꽂힌 칫솔만 7개. 이 회장은 6년째 이곳에서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다. 여섯 살에 들어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이부터 내년이면 자립해야 하는 고등학교 3학년까지 7명의 아이들이 방 4칸짜리 아파트 가정집에서 함께 살아간다.

7명 중 5명은 학대 아동이다. 학대 아동의 경우, 보호자 학대로 아동보호기관에 신고가 되면 아동은 지자체의 보호조치 결정에 따라 아동양육시설 또는 그룹홈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들어온 아동들은 만 18세까지 시설에 머문다.

이 회장은 “가장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할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외면 당한 아이들은 어른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 만나면 배척부터 하는 아이들에게 자매도 만들어주고 엄마도 되어주어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좁혀나가는 이들이지만, 집 밖에서는 모든 것이 지뢰밭이다. 얼마 전 소영이(가명·12)는 집에 와 “나는 태몽이 없는데 어떡하냐”고 울었다. 소영이 학교에서 각자의 태몽을 알아 오고 초음파 사진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준 것. 교육 현장에서 그룹홈이라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아 생긴 해프닝이다.

그룹홈 아이들은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도 곁을 줄 수가 없다. 그룹홈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고백했던 진희(가명·9)는 어쩔 수 없이 그룹홈을 떠나 다른 지역에 있는 시설로 가야 했다. 비밀을 공유했던 친구가 이를 약점 삼아 협박하는 바람에 진희는 밤마다 악몽을 꾸었고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전학을 하려고 했지만, 이사를 하지 않으면 학교를 옮길 수가 없었다. 결국 진희는 지내던 그룹홈을 떠나 서울의 다른 그룹홈으로 옮겨야 했다.

이후 이 회장은 아이들에게 ‘절대 친구들에게 그룹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말라’고 말한다. 4인 ‘정상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숨겨야 할 치부다.

법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그룹홈의 사회복지사는 대개 아이들의 ‘동거인’ 자격이기 때문에 당장 아이들 몫으로 들어오는 생계비 통장을 발급하기 어렵다. 사회복지사가 아이들의 정식 후견인으로 인정받기까지는 6개월 이상의 기간이 걸린다. 학대로 그룹홈에 입소해도 당분간 아이들의 법적 보호자는 원가정의 부모라, 통장 개설 때는 연락을 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비밀번호를 아는 보호자들이 아이들 몫으로 들어온 생계비나 국가 지원금 등을 가져가는 경우가 생긴다. 이번 코로나19로 아이들에게 들어온 재난지원금 일부를 그렇게 학대부모가 가져가기도 했다.

이 회장은 “당장 병원 입원 치료를 받거나, 생계비를 지원받아야 하는데 법적으로 ‘동거인’ 이상의 역할을 못해 난감할 때가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다행히 올 4월 여성가족부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족정책을 개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버지의 성만을 원칙적으로 적용했던 부성우선주의 등을 바꾼다. 같은 집에 살며 성이 다른 아이들이 더 이상 친구들에게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양육 책임을 다하지 못한 학대 부모가 아이들의 돈을 갈취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여나간다. 내년이면 그룹홈을 떠나야 하는 수진이(가명·19)는 “이 그룹홈 가족은 적어도 스무살 전까지는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했다. 대형 보육시설에서도 지낸 경험이 있는 수진이다. 수진이에게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체온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그룹홈이 진짜 가족이다.

글·사진=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