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가족입니다] 3. ‘함께’를 선택한 노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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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에 1번 생존 확인하는 ‘탈노숙 1인 가구 공동체’ 실험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해야 했지요. 그런데 이제 물어볼 사람이 생겼잖아요. 기적 같은 일이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8월 26일 오후, 기자는 부산진구 전포2동 부산희망등대 종합지원센터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노숙인 자조모임 ‘한 울타리’가 열린다. 노숙인끼리 자발적으로 구성한 모임이다. 멤버는 노숙 생활을 중단한 30대부터 사연 많은 60대까지 모두 10명이다.

노숙 생활 중단 10명으로 구성
노숙인 자조모임 ‘한 울타리’
고시원 등 거주 1인 가구 자립
매달 1회 안부 묻고 함께 식사
심적 지지·안정감 주는 ‘식구’
일상 공유하는 ‘대안가족’ 부상

‘한 울타리’라는 이름을 지은 박상훈(가명) 씨는 모임 6년 차다. 자조모임을 하는 동안 그의 삶에는 기적 같은 변화가 찾아왔다고 했다. 수년간의 노숙 생활을 중단한 뒤 일자리를 찾았고, 보증금을 차곡차곡 모아 작은 주택도 마련한 것이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에는 박 씨는 회원들을 집에 초대해 삼계탕 파티도 열었다. 이들을 어엿한 ‘식구’로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부산을 떠나지 않는 이상, 이 모임에 계속해서 참석할 것”이라면서 “만나면 기분이 좋고, 도움받는 일이 많아 아주 유익하다”고 웃었다.

‘한 울타리’ 중심에는 부산희망등대 사회복지사 진현 부장이 있다. 2015년 연말 센터에 다니는 노숙인 4명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것이 이 모임의 계기가 됐다. 진 부장은 “제주여행 때 모두들 즐거워했고, 앞으로도 이런 모임을 하고 싶다고 해서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매달 간식비 5000원을 낼 것.’ ‘모임 전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 것.’ ‘한 울타리’에는 이 두 가지 외에는 규칙이 없다. 옆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는 모든 행동이 자유롭다. 달성해야 할 목적도, 활동 분야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놀이공원 가기, 당구치기, 산책하기, 맛집 탐방 등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일상을 공유할 따름이다.

이들 노숙인 자조모임은 점처럼 흩어진 자활 노숙인을 정서적으로 이어준다. 기존의 노숙인 정책은 주거와 취업에 맞춰져 있었다. ‘친구 만들기’와 같은 정서적 지원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부산시 복지정책과 관계자는 “우울증 상담 같은 심리 상담은 노숙인이 원하면 언제든 받을 수 있지만, 자조모임처럼 소모임을 따로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노숙 생활을 끝내고 자립하려면 주거와 취업이 필수이지만, 스스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심리적인 지원이 중요하다. 집과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자립에 성공한다 해도 대개 고시원에서 1인 가구로 살아가며 외로움과 끝없는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게 노숙인이다. ‘한 울타리’처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할 사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숙인에게는 기댈 곳이 생기는 것과 같다는 게 복지전문가들의 평가다.

부산 한 노숙인 자활시설 관계자는 “참여자 서로 ‘롤모델’이 되어 동기부여를 하기 때문에 자조모임은 심리적 자활 측면에서 꼭 필요한 활동이다”면서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부분은 아니라서 예산 투입은 어려운 측면이 있어, 기존 지원 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모임에 참석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새내기’ 강진철(가명) 씨는 심적 지지가 주는 안정감을 요즘 들어 부쩍 실감하고 있다. 한때 신분증이 없어 일자리도 갖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던 그였다. 하지만 요즘은 매일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매달 모임 친구들을 만나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일상을 나누는 여유가 행복의 싹이 됐다. 강 씨는 “이제는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일에 미쳐 산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다가갈 수 없는 노숙인끼리 서로에게 ‘대안 가족’이 되어 주고 있지만 이들은 법적 지위는 ‘사적 모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다 같이 자리를 하려 해도 방역 수칙을 위반하는 게 되어 버리는 코로나19 시국이 야속하다. 실제로 남동생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는 한귀운(가명) 씨는 이날도 진 부장에게 “저희 만나도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한 울타리’는 그래도 백신 접종을 완료하고 지난 추석에 명절 음식도 해 먹었다. ‘이번 달엔 무슨 재밌는 걸 해 볼까’ 궁리를 하다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니 전을 부쳐 먹기로 한 것이다. 1인 가구로 사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이벤트다. 다 함께 전을 부쳐 먹는 사이, 진짜 ‘식구(食口)’가 됐다는 뜻이다. 이들이 모임에서 찾은 심적 충만함은 또 다른 나눔을 낳을 모양이다. 한 씨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내가 도움을 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앞으로 우리끼리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끝-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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