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아미동 비석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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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농악은 제6호 부산시 무형문화재다. 1980년 2월 지정됐다. 그런데 그 뿌리가 아미농악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아미농악을 정리한 이는 반승반속(半僧半俗)으로 살았던 김한순(1936~2006) 전 한국불교전통문화예술원장이다.

풍물패를 따라 전전하던 김한순은 1963년 부산 아미동에 대성사라는 절을 세우고 정착한다. 승려로서 절을 세운 것이지만, 김한순은 대성사를 자신이 속한 풍물패의 사무실과 연습 장소로도 활용했다. 그의 평생소원이 당시 아미동 일원에서 전해지던 아미농악의 온전한 복원과 전승이었다. 그는 아미농악을 부산농악으로 확대·발전시켜 문화재로까지 만들었다.

개항 이후 부산을 사실상 점거한 일본인들은 부산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공동묘지를 아미동 뒷산으로 옮겼고,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로 기능하게 만들었다. 1957년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화장장이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은 장례 행렬이 끊이지 않아 화장장 고을로 알려지기도 했다.

광복 후 일본인들의 묘지는 방치됐다. 그런데 이곳으로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피란민들은 묘지 위에 판자를 이어 집을 만들었다. 묘지의 비석과 상석은 집 짓는 자재로 이용됐다. 이른바 비석주택으로, 죽음의 공간을 삶의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아미동 비석마을의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됐다.

생과 사가 교차하고 아픔과 치유가 엇갈리는, 지난한 삶이 있는 곳에는 그 한을 풀어내는 소리와 몸짓이 있기 마련이다. 굿이라 해도 좋고 풍물이라 해도 좋을 그것을 아미동 주민들은 농악으로 표현했다. 김한순은 당시 제각각 흩어져 있던 아미동의 농악을 아미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고, 이후 부산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거듭나게 해 마침내 문화재가 되게 했다.

그런 아미동과 관련된 문화재가 하나 더 생길 수도 있게 됐다. 부산 서구청이 최근 부산시에 아미동 비석주택 구조물을 시 등록문화재로 선정해 달라고 신청한 것이다. 시·도 등록문화재 제도는 2019년 12월부터 시행됐고, 아직 부산시 등록문화재는 없다. 비석주택 구조물이 남아 있는 공간은 현재 서구청이 피란생활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죽음(묘지) 위에 들어선 삶(집)이라니! 생과 사,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만으로도 비석주택은 이미 문화재로서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결과 있기를 기대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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