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일기] 부산시 문화유산 보존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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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림 사회부

부산 서구 까치고개 한 구석에는 벽돌 더미가 한가득 쌓여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을 먹이고 가르쳤던 은천교회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들이다. 반년 가까이 방치된 이 벽돌들은 부산시 문화유산 보존 정책의 쓸쓸한 현주소를 보여 준다.

은천교회가 철거된 것은 올 5월이다. 아미4행복주택 진입도로 확장공사에 부지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근대 석조건축물인 은천교회는 부산시가 진행한 연구용역에 ‘핵심유산’으로 꼽혔다. 그러나 철거 현장에서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저 건축물 대장이 없는 무허가 건축물일 뿐이었고, 등록문화재가 아닌 사유재산일 뿐이었다.

완월동 유곽에 피란민이 살았다는 구술 증언이 처음 나왔을 때도 부산시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났다.

부산시는 발주한 연구용역 성과를 공유하겠다며 시민강연회를 열어놓고는 기자에게 해당 내용을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연구에 도움을 준 구술 증언자의 개인정보가 침해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연구 수행 용역기관인 부경대학교가 낸 보도자료에는 이 구술증언자의 성 씨와 출생 연도까지 명시돼 있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가 완월동의 가치와 도시재생 가능성에 대해 쓸 게 아니냐”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부산시가 더 신경을 썼던 것은 역사적 가치보다는, 해당 내용이 보도됐을 때 빗발칠 주변 재개발 민원이었던 것이다.

은천교회와 완월동 모두, 부산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를 추진하는 ‘피란수도 부산’의 한 갈래다. 부산 곳곳이 피란역사 흔적이라 무한정 등록 대상 범위를 넓힐 수 없는 점, 인력이 부족한 점, 소유자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점 등 부산시의 해명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부산시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강력한 보루여야 한다. 개발 앞에서 부산시마저 작아지기만 한다면 앞으로 누가 보존에 나서겠는가.

‘미래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실질적인 보호 방안이 전무한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도 마찬가지다. ‘미래유산’ ‘핵심유산’ 등 번지르르한 이름표만 붙여 놨다. 개발 민원에 밀려서 부서지면 그만인 것일까? 부산시의 문화유산 보호 정책이 ‘정신 승리’여서는 안 될 일이다. hyerim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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