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황성 옛터와 노다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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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는 일제에 의해 멸망한 조선과 망국의 한을 떠올리게 해 조선총독부가 금지곡으로 분류할 정도였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도 황성 옛터가 울려 퍼졌다. 부산제2상업학교(구 부산상고·현 개성고)와 동래중학교(현 동래고) 학생 1021명은 황성 옛터와 아리랑을 부르며 대신동 전차종점과 광복동, 보수동을 거쳐 영선고개를 넘었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 차별 교육을 없애라, 우리는 쪽발이 놈을 증오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경남지구 위수사령관인 일본군 대좌 노다이 관사로 몰려갔다. 흥분한 학생들의 돌팔매질로 외등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미닫이며 장지문도 떨어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전시동원체제를 가동한 일제는 학교에 현역 장교를 파견하고, 조선 학생들의 군사교련과 학교 병영화 정책을 강화했다. 이날도 그 일환으로 수류탄 던지기 등 15개 종목으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열렸다. 심판장을 맡은 노다이가 일본인 학교가 우승하도록 편파 판정을 하고, 단체로 항의하는 동래중과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과 교사를 모욕하자 항일시위로 격화됐다.

‘부산항일학생의거’, 일명 ‘노다이 사건’은 전시 체제 아래 모두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일제의 대륙 침략전쟁 전초기지인 부산 한복판에서 일어난 국내 최대 규모의 학생항일운동이었다. 일본 헌병대와 경찰이 귀가하는 학생 200여 명을 한밤중에 검거했다. 이 중 14명은 실형을 받았고, 2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이후 노다이 사건에 참가했던 동래중 출신 학생들을 주축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라는 강령의 비밀결사조직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한다. 일본군 탄약고와 군용열차 폭파 등 항일투쟁 계획을 세웠으나 1944년 일제에 발각돼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11월 23일 올해도 부산항일학생의거 기념탑 앞 광장에서 8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특히, 올해는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로 본 식민통치의 실상’ 주제 세미나에서 보다 많은 부산지역 독립운동가의 발굴과 포상을 촉구하는 강연도 열렸다고 한다. 우리가 위로하고 기리지 않으면 누가 할까? 허리 숙여,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신한 선열들을 추모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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