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40. 파르바티 아사나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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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바티 아사나는 양 손가락을 깍지 낀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쭉 뻗으면서 가슴을 활짝 열고 횡격막을 늘려주는 자세다. 마치 자신이 큰 산이 된 듯하게 설산과의 교감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행한다. 시연 허수정. 파르바티 아사나는 양 손가락을 깍지 낀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쭉 뻗으면서 가슴을 활짝 열고 횡격막을 늘려주는 자세다. 마치 자신이 큰 산이 된 듯하게 설산과의 교감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행한다. 시연 허수정.

인도신화에서 파르바티(Parvati)는 히말라야 산(山)들의 왕인 파르바타의 딸이라 일컬어진다. 약 5000만 년 전에 생성된 히말라야는 범어로 히마(hima)는 눈(雪), 알라야(alama)는 머무는 곳인 거처를 뜻하여 눈의 거처, 만년설의 집 즉 설산(雪山)이라고 한다. 그래서 파르바티 아사나는 히말라야 자세, 설산 자세라고도 부른다.

“아, 거대한 히말라야여! 눈의 왕관을 쓴 신령한 왕이여 내 마음 속에 너의 왕자가 쉬고 있다. 너의 고향이 내 안에 있다, 내 안에.” 요가난다가 이렇게 읊조렸던 바로 그 히말라야다.

인도신화에 의하면 파르바티의 아버지 격인 파르바타 히마반(Himavan)에게 딸 둘이 있었는데 둘째 딸이 바로 히말라야 산의 딸을 의미하는 파르바티이고 언니인 큰 딸은 강가(Ganga) 즉 갠지스강이라고 한다.

히말라야 산맥은 파키스탄 인도 중국 티벳 부탄 네팔에 걸쳐 있으며 8000m가 넘는 봉우리 14좌를 보유한 동서 약 2500km 길이에 남북 300km의 거대한 산맥이다. 이 중 8개의 봉우리를 보유한 네팔은 전체 히말라야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어 보통 히말라야 하면 네팔 히말라야를 떠올린다.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있는 것은 이곳에 있으리라”라는 우파니샤드의 말을 실현하는 것처럼 히말라야는 동서남북으로 세상을 아우르며 펼쳐지고 있다.

문장가들은 ‘히말라야의 우뚝 솟은 봉우리들은 지혜의 솟아남이요, 심연의 골짜기는 깨달음의 깊이’라고도 묘사하고 있다. 생명체들의 순환 에너지가 깃들고 귀의하는 곳이 바로 산이라는 법화(法華)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히말라야는 지금도 성자(聖者)와 신화를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있나 보다.

먼저 연꽃 자세(파드마 아사나)로 앉은 후 가슴 앞에서 합장한다. 상체를 바르게 세워 합장한 손을 느릿하게 정수리 위로 올렸다가 더 높이 쭉 뻗어 올리며 그대로 자세를 얼마간 유지하다가 내린다. 자세를 바꿔 양 손가락을 깍지 낀 채 다시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쭉 뻗으면서 가슴을 활짝 열고 횡격막을 맘껏 늘려준다. 눈을 지긋이 감고 자연스런 호흡을 유지한다. 목과 어깨의 긴장을 풀어주며 늑골과 흉부 근육을 펴줌으로써 호흡기 계통을 활성화시킨다. 류머티즘의 통증과 어깨 경직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복부기관을 수축시키며 아나하타 차크라를 각성시킨다. 거대한 설산을 닮은 이 자세는 설산과의 교감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면서 행한다. 마치 자신이 큰 산이 된 듯하게.

시바는 첫 번째 아내 시타가 죽은 후 세속을 떠나 히말라야에서 깊은 명상에 몰입했다. 오랜 시간 지나는 동안 시바는 세속적인 욕망을 접고 고행에 고행을 거듭했다. 그동안 첫 번째 아내였던 사티는 파르바티라는 이름으로 환생하여 히말라야에서 명상 중인 시바를 보좌한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결국 시바는 사랑의 신 까마데바의 꽃과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사랑의 화살을 맞고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파르바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인도신화가 사뭇 흥미롭다. 파르바티는 시바의 첫 번째 아내인 사티가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이었지만 사티보다 훨씬 더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오랜 세월에 걸쳐 후세의 많은 시인들 특히 칼리다사 등이 ‘왕자의 탄생’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화려하게 칭송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와 매우 흡사하다.

이렇듯이 완벽한 여성미의 상징인 파르바티는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소원을 잘 들어주는 타라, 차갑고 냉혹한 성격의 칼리, 따뜻한 성격의 빛나는 가우리, 먹거리를 제공하는 안나푸르나, 적을 공포로 몰아 응징하는 바이라비, 생식을 담당하는 안비카, 접근하기 어려운 두르가 등이다. 이처럼 파르바티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응축된 존재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말하자면 파르바티는 인도의 비너스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마 유목민족이 믿는 신은 남성적인 성향이 강하지만, 농경민들의 신은 대지에 은혜를 가져다주는 생산과 번영의 신, 즉 지모신(地母神)의 성격이 강하다. 인도대륙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있다. 여기에 사랑하는 시바의 명예를 위해 과감히 불 속에 몸을 던졌던 시타(사티의식)가 파르바티로 다시 태어나 시바와 재결합하는 이야기는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결합한다는 사랑의 또 다른 파노라마다.

서산대사는 “천가지 생각, 만가지 갈등과 번뇌란, 사실 붉은 화로에 한 점 눈송이다(千計思量 紅爐一點雪 천계사량 홍로일점설)”라는 유명한 임종게를 남겼다. 이런 ‘숯이 불타는 시뻘건 화로’ 못지않게 ‘빙설 뒤덮인 하얀 화로’ 히말라야 역시 영적이며 더불어 만 가지 번뇌 또한 순식간에 제압한다고 산악인들은 역설하고 있다.

산악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산에 가면 행복하다.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스승을 만나는 것 같다”라는 답을 주저없이 한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순간마다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노정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만 의존하는 발걸음 하나로 철저히 홀로 됨과 자유를 갈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산악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히말라야는 말 그대로 죽음의 산이다. 그런데도 이런 위험천만함을 무릅쓰고 많은 산악인들이 고귀한 생명을 기꺼이 던진다. 이유는 단 하나, ‘산이 있기에 오르고 그리고 죽는다’라는 비장한 문장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8000m 이상의 고봉들인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의 14개 봉우리들을 일컬어 히말라야 14좌라 칭한다. 에베레스트, 케이투,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초오유,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낭가파르바트, 안나푸르나, 가셔브롬1, 브라드피크, 가셔브롬2, 시샤팡마가 그것이다. 이런 히말라야 14좌 정상 도전은 모든 산악인들의 꿈이자 희망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악인들이 여기에 도전하여 극소수만이 정상 등극에 성공했다. 많은 대원들이 등반 도중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히말라야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도전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등정한 사람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20명뿐이다. 그중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오은선 여성대장 등 한국인이 4명이라니 가슴 뿌듯한 자부심이 든다.

영화 ‘히말라야’는 엄홍길 대장과 휴먼 원정대의 감동실화를 다루었다. 황정민, 정우 주연으로 2015년 12월에 개봉된 이석훈 감독의 작품성 빼어난 작품이다. 엄홍길 대장의 어록에서 “20~30cm의 보폭이 모여 8000m가 된다”, “1%의 희망만으로 99%의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주옥같은 말도 되새겨 본다.

또한 히말라야 하면 빼놓을 수없는 산이 있다.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영적 세계 가운데 최고의 땅이라는 카일라스가 바로 그 산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존경심 가득찬 시선으로 합장하며 온몸 던지며 오체투지를 아끼지 않는, 강린포체라 불리는 카일라스는 눈(雪)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보석이라는 뜻이다. 카일라스는 히말라야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6714m로 근원의 산이라는 의미를 띤다. 히말라야 최고봉인 초모룽마 즉 에베레스트 8848m에 비해 턱없이 낮지만 특히 불자(佛者)들에게는 수미산으로 존숭된다. 그들은 이 산의 제일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곳은 지구의 기(氣)가 응집되어 있다는 히말라야 골짜기이고 지구의 배꼽이다. 선도 수행자들은 성스런 이 바위산에서 강한 암기(岩氣)를 내뿜어 차크라를 각성시키는데, 소주천·대주천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카일라스 산의 주변을 돌면서 순례하는 것을 코라(Kora)라고 한다. 카일라스 산을 신성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코라 순례가 일생일대의 과업이자 소망이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런 수미산(수메르산)은 실제의 산이자 형이상학적 산이기도 하다. 세계의 단전(丹田)에 해당되는 곳이 바로 수미산(수메르산)이다. 이 산은 히말라야를 넘어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산으로 여겨지고, 티베트의 토착종교, 불교 각파와 라마교 그리고 서역과 중국 오지에 이르기까지 마음 속의 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삶의 무대에서는 사람이 곧 히말라야가 된다. 사람의 깊이와 높이가 만년 설빙의 저 에베레스트보다, 저 카일라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그 이하는 아닐 듯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최종 등정 무대는 오히려 히말라야 14좌보다 더 높디 높은 걸 어이하랴. 그러기에 우리가 매사에 자신을 낮추고 더욱 겸양해져야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자 루카램은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신에 가까워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해 지는 광경의 황홀함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아!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우파니샤드에서도 읊조리고 있다. 오늘도 히말라야는 ‘자신이 스승이고 자신이 경전이고 자신이 교과서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신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는 듯 여여(如如)하기만 하다.

사진으로, 영상으로나마 만나는, 물이 얼어붙고 설빙을 가진 저 히말라야 설산 봉우리들은 보면 볼수록 마치 위대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닮았다. 수천만년간 그 자리에서 꼼짝 않는 저들의 꼿꼿함을 보면 때로는 바즈라 아사나로, 때로는 파드마 아사나로, 때로는 싯다 아사나로 앉아 깊은 삼매에 든 요가 수행자를 떠올리게 된다. 정중동(靜中動)이며 동중정(動中靜)이다. 적연부동(寂然不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저 설산처럼 깊어질 수 있을 것이며, 얼마나 더 많이 욕망에 찌든 찌꺼기를 씻어내야 저 설산처럼 평온하고 깊은 눈빛을 가질 수 있을까? 마주할 수 있을까? 위대한 영혼을 가진 자만이 위대한 영혼을 알아볼 수 있다 하는데.

히말라야에선 걸음 하나하나가 명상이 되고 하타요가가 될 듯하다. 산을 걸어가며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었다가 종국엔 산마저 잊어버리는 그런 수행이 가능할 것만도 같다. 그 히말라야를 생각하면서 네팔 영화 ‘히말라야 ost’곡을 배경음악으로 이 파르바티 아사나를 실행해 보기를 권한다.

영산(靈山) 히말라야의 딸, 파르바티의 이름이 들어간 단순한 듯한 이 파르바티 아사나 한 동작이 오늘따라 조금은 새롭게 느껴지며, 때로는 우리의 몸과 영혼 속으로 그 기운들이 훅 파고 들어오는 행운도 맛볼 수있었으면 좋겠다. “아침 햇살에 이슬이 사라지듯 히말라야를 바라봄으로써 인간의 죄는 그렇게 사라진다, 와서 보라”(임현담)고 손짓하는 히말라야. 꿈은 이루어진다 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한없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도 무한히 그를 사랑하리라. 그로부터 분리를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나는 그에게 나를 갖도록 한다. 이것이 나의 진실한 약속이다. 그대는 나에게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올라가고 싶은 산 하나쯤 마음속에 품고 산다. 하여 필자는 히말라야를, 카일라스 산자락을 걷는 모습을 늘 꿈꾸며 산다. 거실에 걸린 대형 카일라스 사진에 눈길 한번씩 주면서. 언젠가는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인 이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기약해 본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부적같은 말 하나 가슴에 품고서.



<히말라야 / 최진태>

1.아, 만년 설산/ 장엄하고 웅대한/신령하기도

2.오, 파르바티/ 인도의 비너스라/ 히말라야 딸

3.오늘도 듣네/ 사랑의 진혼곡을/ 죽음 너머서

4.한 점 눈송이/ 붉은 화로에 핀/번뇌 녹이네

5.강린포체라/ 마음속 품은 영산(靈山)/ 지구의 단전(丹田)

6.자신이 스승/ 자신이 경전임을/ 설하고 있는

7.쏙 빼닮았다/ 위대한 요가 행자/ 설산 봉우리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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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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