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어린이의 어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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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가끔 아이가 소개하는 노래를 유튜브에서 함께 듣는다. 교과서에 실린 동요나 TV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인기가요가 아는 노래의 전부였던 내 어린 시절과는 달리, 요즘 초등학생들은 플레이 리스트가 꽤 폭넓은 것 같다. 아이가 꽂힌 노래는 한동안 우리 집의 메인 테마송이 된다. 춥고 어둡고 차갑고 무서운 바다 속에 사는 문어가 꿈속에서만큼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가사의 ‘문어의 꿈’, 노란 신호등 앞에 서서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청춘의 마음이 담긴 ‘신호등’, 우리의 삶이 끝없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 같다고 노래한 ‘회전목마’. 모두 아이로부터 소개받은 노래들이다. 때로는 귀여운 동화 같고 때로는 심오한 철학 같은 그 노래 가사들을 초등학생인 아이가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중년의 나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문장들이 꽤 있다.

최근 아이의 마음을 저격한 노래는 더 키드 라로이와 저스틴 비버가 부른 ‘Stay’. 똑같은 실수로 또 다시 떠나보낸 연인을 붙잡는 노래다. 유튜브로 그 노래를 계속해서 반복 재생해 듣는 아이를 보며 ‘야, 네가 그 마음을 알아? 사랑이 뭔지, 미련이 뭔지 아냐고.’ 하는 속엣말에 피식 웃었다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모르겠나 싶다. 어리다고 그런 감정이 없을 거라는 건 나이 들어버린 자의 오만이고 착각이지. 경험의 종류가 다르고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을 뿐, 마음을 흔드는 감정의 물결은 누구에게나 오고 간다.

한국어 노래야 금세 따라 부르겠지만 이 노래는 워낙 휙휙 지나가버리는 빠른 영어 가사 때문에 웅얼거리며 허밍만 하다가, 우리는 하루에 두 문장씩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화면 아래에 영어로 나오는 가사를 한글 발음으로 적어달라던 아이가 문득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엄마, 친구들 말로는 이 노래 가사 중에 욕이 나온다는데…. 불러도 될까?” 아이 말을 듣고 전체 영어 가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더니 I’ll be fucked up(난 엉망이 되어버릴 거야)라는 속어로 된 문장이 나오긴 한다. 글쎄, 이걸 욕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에게 ‘fuck’이 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단어와 합쳐져서 의미가 좀 달라졌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어쩌지?”하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fucked up’의 발음을 ‘fecked up’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아이가 비속어를 입에 그대로 담는 걸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다. 내게 그런 말을 전할 때면 금기어처럼 에둘러 표현한다. 예컨대 길에서 누가 욕을 하는 걸 들었다고 나에게 일러줄 때, 무슨 욕이냐고 물으면 “씨앗의 앞 글자랑 발가락의 앞 글자.” 또는 “존중의 앞 글자랑 나비의 앞 글자.” 이렇게 대답하는 식이다. 어린이의 어휘 목록은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들보다 훨씬 아름다워서, 아이의 방식으로 풀어지는 비속어들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착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제는 길을 가다 싸우는 이들의 욕설을 스쳐 듣게 되어도 씨앗의 발가락을 생각하고, 문장마다 추임새 넣듯 남발하는 비속어가 귀에 꽂혀도 나비를 존중하는 마음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착한 어휘 목록을 가졌던 어린이도 몇 년 후에는 비속어로 가득 찬 문장만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한 듯 욕설을 내뱉는 어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가 구사하는 예쁜 단어들은 책 사이에 꽂아둔 나뭇잎처럼 남아서 언제라도 나를 슬며시 미소 짓게 할 것 같다. 훗날 어른이 된 아이에게 그 나뭇잎을 건네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늘도 나를 보는 아이의 눈동자는 새까맣게 투명하다. 그 눈동자를 보며 나는 노래 부른다. I’ll be fucked up if you can’t be right here. (네가 없으면, 난 엉망이 되어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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