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산의 뿌리 ‘망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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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수영고성연구회 공동대표

수영구는 역사의 도시다. 조선의 수군부대가 주둔하던 곳이 지금의 수영이다. 역사의 도시답게 곳곳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옛날부터 누대에 걸쳐 지역민의 식수로 쓰였다. 그래서 오래된 도시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고 우물의 역사는 그 지역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역사의 도시 수영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은 단연 망미동 병무청 우물이다. 부산시립박물관 발굴로 드러난 사실이지만 망미동 우물의 역사는 통일신라로 올라간다. 발굴을 통해 통일신라로 추정되는 우물 넷을 확인했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둘을 병무청 주차장 뒤편에 이전, 복원했다.

신라 우물이 여기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망미동 일대가 그때 이미 사람의 마을이었다는 이야기다. 우물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이용하는 공공의 성격이 짙었기에 이 일대가 그 옛날부터 집단 거주지였다는 방증이 병무청 우물이다.

망미동이 집단 거주지였다는 사실은 옛날 지도에서도 알 수 있다. 옛날에 제작한 거의 모든 지도, 예컨대 1700년대 중반에 제작한 ‘해동지도’ ‘여지도’ ‘지승’ 영남지도‘ 등 숱한 고지도가 망미동 한복판에 성이 있었음을 밝힌다. 망미동 일대가 성을 세워서 지켜야 할 만큼 부산의 요지였다는 이야기다.

옛날 지도만 그런 게 아니다. 이삼 백 년 이전에 관청에서 발간한 부산의 백서인 도 여기에 ‘서·동·남쪽은 돌로 쌓았고 서북은 흙으로 쌓은 둘레 4,431척’의 큼지막한 성이 있었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백서를 발간할 무렵에는 ‘무너졌다’며 아쉬워한다.

부산시립박물관 발굴은 2003년부터 2005년에 걸쳐 이뤄졌다. 이 발굴을 통해 통일신라로 추정되는 성터와 배수로, 제방, 그리고 우물 4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망미동 일대 성터가 조선시대 동래읍성의 전신이었다는 것이다. 여기 있던 성이 지금의 동래로 옮겨 동래읍성이 되고 여기 있던 원래 성은 동래고읍성이라 불렸다. 이러한 정황은 발굴이 마무리된 후 부산박물관이 세운 병무청 우물 안내판에도 나온다.

조선시대 내내 지금의 동래가 부산의 중심지였듯 그 이전 부산의 중심지는 망미동이었다. 유장하게 흐르는 수영강과 대해로 나아가는 바다와 맞닿은 망미동 일대는 그 옛날부터 사람이 거주하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삶터였다. 호조건을 두루 갖춘 삶터를 찾아서 사람이 모였으며 자연스럽게 지역의 중심이 되었다.

망미동이 부산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망미동의 또 다른 성터에서도 입증된다. 망미동과 연산동 경계인 배산(254m) 정상부에 있는 배산성(盃山城) 성터가 그것이다. 6, 7세기 출토 유물로 미루어 동래고읍성과 비슷한 시기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배산성은 수영강과 수영 앞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부산을 지키고 부산의 중심지 망미동을 지켰을 것이다.

망미동 동래고읍성은 위치상으로도 이 일대 성의 중심이었다. 연대는 달랐지만 동래고읍성을 중심으로 위쪽에 배산성이 있었고 아래쪽에 수영성이 있었다. 그리고 수영강 너머에 동래읍성이 있었다. 만약 수영강 이쪽 세 군데 성이 모두 복원된다면 동래고읍성은 그 중심이 될 것이다. 지금 동래에 있는 읍성을 포함해 부산 도심에 있는 성의 중심, 부산 도심에 있는 성의 뿌리가 지금 우리가 사는 망미동에 있던 동래고읍성이다.

감히 제안하고 싶다. 수영강을 낀 이곳저곳 부산 도심의 성을 우리 시대에 복원해 보는 건 어떠냐고. 원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복원해 국경도시, 충절의 도시 부산의 상징으로 부각해 보는 건 어떠냐고. 쉽지는 않겠지만 학계와 관계기관, 시민사회가 뜻을 한데 모아 시도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것은 부산을 지키느라, 부산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를 지키느라 갖은 상처를 입은 옛날 성에 대한 답례이면서 부산의 뿌리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망미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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