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월북작곡가 김순남과 동래여고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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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오랜만에 뵌 노 작곡가의 이야기다. 진주사범학교 동기의 장례식에 갔더란다. 팔순을 넘긴 이들이 영정 앞에서 느닷없이 교가를 부른 것도 그러하거니와, 세월이 흘렀어도 누구랄 것 없이 가사며 선율이 또렷하여 낯설기조차 했다. 교가는 오월의 청보리처럼 푸른 학창시절로 들어서는 기억의 물꼬였다. 교가에는 으레 지역의 심상성 높은 장소나 산과 들, 강이 등장한다.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밝히겠노라는 다짐도 빠질 수 없다. 학교를 상징하고 자부심을 드높이는 노래인 만큼 작사와 작곡은 대체로 명망가에게 맡긴다.

1895년 10월 호주장로교선교회 여자전도부가 사립일신여학교를 설립했다. 부산경남지역 근대 여성교육의 효시였다. 좌천동에서 동래로 이전하여 1926년 1월 동래일신여학교가 문을 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빚다 1940년 3월 폐교했다. 학교를 존속해야 한다는 뜻을 모아 지역주민과 유지들이 구산학원을 설립하고, 그해 5월 동래고등여학교가 개교했다. 해방 후 동래여자중학교로 개칭한 이 학교는 오늘날 동래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동래여중은 1945년 12월 5일 교가 제정 발표식에 이어 6일 시창회를 개최했다. 교장 권녕운이 지은 노랫말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 김순남이 곡을 붙였다.

김순남은 1917년 서울에서 나서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떨쳤다. 1937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경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대)에 진학하여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을 주도한 하라 타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를 계기로 음악이 민족을 대변하고 민중의 삶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음악관을 다지고 그 실천에 뜻을 두었다. 1948년 좌익 체포령을 피해 월북했다. 한국전쟁 이후 숙청당해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1980년대 초중반 폐병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쇼스타코비치가 “동양에도 이런 귀재가 있었느냐”고 했을 만큼 빼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음악성을 꽃피우지 못한 비운의 천재였다.

김순남이 작곡한 동래여중 교가는 새로운 민족국가건설의 도정에서 “새나라의 일꾼”, “학원의 꽃”으로 피어날 기대를 선율에 담았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며, 리듬이 안정적이라 가사에 집중할 수 있다. 이 노래는 예술계의 재편이 이루어진 한국전쟁 전후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교지 ‘옥샘’ 제6권(1952.4)에는 금수현이 작곡한 현재의 교가가 수록되어 있다. 김순남의 음악은 1988년 10월에 이르러서야 해금됐다. 현대음악의 어법에 한국적 정서를 오롯이 담아낸 음악적 성취를 볼 때, 김순남은 한국 현대음악의 북극성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명민한 음악가의 빛나는 예술혼이 이데올로기의 폭력에 스러져간 일은 한국음악사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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