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세월 돌아온 우리네 삶, 거친 들판 꽃길처럼 환하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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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등단 성선경 시인
시집 ‘햇빛거울장난’ 발간
재치 넘치는 시구절 속
사유하는 즐거움 묻어나

성선경 시인 성선경 시인

경남 창원의 성선경(62) 시인이 〈햇빛거울장난〉(파란)을 냈다. 책날개에서 꼽아보니 시집으로 열세 번째다.

1988년 〈한국일보〉 신춘 등단 이후 34년 시력을 쌓으며 그는 이런저런 문학상들도 받았다. 그의 시는 말의 꽃을 피우는 재치가 넘친다. ‘한 번도 산 것 같지 않게/다 어제 같은데//붓은 지나갔지만 비어 있는/먹물도 묻지 않은 흰 머리칼.’(‘비백(飛白)’ 중에서). 허망한 세월을 살면서 시를 쓴다고 썼는데 희게 센 머리칼을 보니 먹물도 묻지 않은 거 같다는 거다.

가난한 시인의 엄살 같은 토로도 읽힌다. ‘없는 집 장남이라 낭패/육 남매 맏이라서 낭패’, 그래서 ‘내가 잡은 패는 낭패’라고 썼다. ‘좋은 시 한 편이 작은 쌀 한 포대보다 못하여/저 봄날이 한없이 서럽다네’(‘꿀벌처럼’ 중에서). ‘이 빈궁, 또 한 달 견뎌볼까?’(‘궁(窮)’ 중에서)


절의 꽃살문을 보고서는 ‘기도가 얼마나 깊으면 꽃이 되나?’라고 반문하면서 ‘생각의 사리들’인 시가 ‘보석이 되는’ 장면을 그는 열어 보인다. 시가 바로 ‘사리’이자 ‘꽃’이다. 꽃이 열매를 맺어 ‘한 톨 한 톨 알곡’이 되고, ‘밥솥의 뜨거운 김’과 섞여 드디어 밥이 되는 과정을 한 문장 속에 집어넣어 그는 ‘모든 밥은 꽃밥이다’라고 적었다.

먼 세월을 돌아온 그는 스스로를 ‘늙은 원예사’라고 말한다. ‘이제 이 거친 들판을 그만 걸었으면 했을 때/문득 내 앞에 웬 꽃길/꽃 화분 서른한 개가 놓여 있네’. 그 ‘서른한 개의 꽃 화분들이 차례로 꽃을 피워/눈만 뜨면 물조루를 들게 하고’ 그 꽃들로 인해 갑자기 ‘흐린 눈이 다시 맑아져’ ‘안경을 벗고도 꽃길이 다 보이네’. 그는 서른한 개의 꽃 화분을 키우는 것 같은데 그것은 화분인 것도 같고, 한 달 31일로 꼽아지는 우리 삶의 하루하루인 것도 같다. 놓을 듯 잡고 있는 것은 이 거친 삶이며, 그 거친 삶의 들판은 알고보니 꽃길처럼 환하다는 거다. 그는 묻는다. ‘밥은 문나?’(49쪽).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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