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떠나고 싶을 때, 옛 기차역에 내려 보세요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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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으로 변신한 부산 옛 해운대역, 대구 옛 고모역
수많은 발길 다시 몰리는 부산 송정역, 창원 옛 경화역
철도박물관·도서관 된 김해 옛 진영역, 대구 옛 반야월·동촌역

해운대 해변열차 정거장으로 쓰이는 부산 해운대구 옛 송정역. 해운대 해변열차 정거장으로 쓰이는 부산 해운대구 옛 송정역.

이용객이 점점 줄어서, 철도 노선이 옮겨 가거나 사라져서. 기차역이 문을 닫는 이유다. 기차가 서지 않는 역들은 대부분 철거됐지만, 여전히 역사(驛舍, 역 건물)가 남아 긴 역사를 이어가는 역들이 있다. 옛 기차역들은 주민 문화 공간, 관광지, 작은 도서관, 철도 박물관 등의 모습으로 일상에서 잠시 떠나온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부산 해운대구의 부산도시철도 해운대역에서 핫한 관광지 ‘해리단길’로 가는 길에 ‘옛 해운대역’이 있다. 더 이상 기차는 지나가지 않지만 수많은 이들의 발길은 역을 스쳐 지나고 있다. 여행용 가방을 끌고 옛 플랫폼이었던 곳을 지나 해리단길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관광객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 막 기차에서 내린 이들인가 착각이 든다. 옛 해운대역사는 ‘해운대 아틀리에 칙칙폭폭’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청년 예술가들에게는 작품을 창작하고 전시하는 공간이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예술을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옛 해운대역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국내 철도역 중에서 유일하게 팔각지붕 형태로 건축된 건물이다. 1934년 건립됐고, 2013년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화 공사로 폐역이 됐다.


부산 해운대구 옛 해운대역사는 문화공간인 ‘해운대 아틀리에 칙칙폭폭’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부산 해운대구 옛 해운대역사는 문화공간인 ‘해운대 아틀리에 칙칙폭폭’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대구 수성구 옛 고모역의 내부.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대구 수성구 옛 고모역의 내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대구 수성구의 ‘고모’라는 지명은 가수 현인이 부른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익숙하다. 일제강점기 이곳이 징용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이 전한다. ‘옛 고모역’은 1957년에 지은 것이다. 이용객 수가 계속 줄어 2006년 역무원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면서 실질적으로 폐역이 됐다. 옛 고모역은 2019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고모복합문화공간에서 만난 관계자는 “주민들의 산책 장소,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아이들의 견학 장소, 학생들의 역사 공부 장소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역사 바깥에 산책로로 꾸며진 메모리 가든과 기차 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파빌리온 공간도 발길을 잡는다.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몰린다

요즘 부산에서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해운대 해변열차’이다. 해운대 해변열차는 해변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해운대 미포에서 청사포를 거쳐 송정까지 왕복으로 운행하는 관광열차다. 옛 동해남부선 폐선 4.8km를 활용했다. 송정정거장은 1941년에 지은 ‘옛 송정역’ 역사를 활용하고 있다. 옛 송정역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역사와 노천 대합실, 역사 양쪽 150m 철로, 승강장까지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해변열차에 오르내리는 순간 옛 동해남부선의 역사와 만나게 된다. 해변열차는 한 달 탑승객이 10만 명에 이르며, 지난해 부산관광공사 여행 선호도 조사에서 방문 희망 관광지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기차가 달리던 철로는 이제 관광객들의 추억을 실어 나르고 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공원. 경화역사는 2000년에 철거됐고 축소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공원. 경화역사는 2000년에 철거됐고 축소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따뜻한 봄날이면 열차 위로 벚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이 미디어에 자주 등장한다. 그곳은 폐역이 된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경화역’이다. 매년 봄이면 철길 따라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경화역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개통했다.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됐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1987년 간이역으로 바뀐 후 을종승차권만 팔았다. 을종승차권은 출발지만 인쇄돼 있고 도착지는 역무원이 직접 써서 파는 표를 말한다. 경화역 역사는 노후화를 이유로 2000년에 철거됐고, 2006년 해군 통근열차 운행이 폐지되면서 경화역도 폐쇄됐다. 경화역에는 경화역 건물이 없고 축소 모형만 있지만 ‘경화역’이라는 이름은 아직 살아 있다.


■세월 쌓인 곳에서 책장을 넘긴다

대구 동구의 ‘옛 동촌역’은 작은 도서관이 됐다.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박공지붕 건물이 동화 속 오두막 같은 느낌이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에서 엄마와 함께 온 아이가 그림책을 읽고 있다. 아이의 할아버지·할머니 나이만큼 오랜 세월이 쌓인 곳에서 신간 그림책을 넘기는 모습에 괜히 뭉클해진다. 1938년 지어진 옛 동촌역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대합실의 큰 박공지붕과 사무실의 작은 박공지붕 형태가 특이하다. 2005년 대구선이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여객 취급이 중단됐고 3년 뒤인 2008년 폐역이 됐다. 이후 300m 떨어진 동촌공원으로 역사를 옮겨 2014년 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작은 도서관이 된 대구 동구 옛 동촌역. 작은 도서관이 된 대구 동구 옛 동촌역.

대구 동구 옛 반야월역 작은 도서관의 2층 다락방. 대구 동구 옛 반야월역 작은 도서관의 2층 다락방.

대구 동구에는 폐역을 활용한 도서관이 한 곳 더 있다. ‘옛 반야월’ 역사로, 이곳도 등록문화재이다. 동촌역과 마찬가지로 대구선이 이설되면서 2005년 여객 취급을 중단했고, 2008년 폐역이 됐다.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2010년 현재 위치로 역사를 옮겼다. 옛 반야월역은 동촌역과 달리 박공지붕이 건물 중심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층 다락방이 있어 모험을 떠나는 느낌으로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주위에 아파트 단지가 많이 있어 어린아이와 부모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철도 역사를 배우고 커피 향을 싣고

역 대합실에 들어서자 까만 모자와 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과 한복을 입고 홍시를 내밀고 있는 아주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다. 순식간에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하다. 경남 김해시 ‘옛 진영역’이 변신한 진영역철도박물관의 모습이다. 1943년 현재의 진영역사가 개축됐고, 2010년 경전선 복선화 사업으로 KTX진영역이 건립되면서 폐역이 됐다. 한동안 방치됐다가 역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역사는 철도박물관으로 꾸몄다. 실제 진영역을 촬영한 화면을 보면서 열차를 운행해 보는 기관사 체험과 기차표·진영역·마산선 이야기 등 발길을 멈추게 하는 전시물들이 알차다. 지역 예술가들의 작은 갤러리로도 쓰인다.


경남 김해시 옛 진영역에 꾸며진 진영역철도박물관. 경남 김해시 옛 진영역에 꾸며진 진영역철도박물관.

새마을호 열차를 카페로 조성한 대구 동구 금강역. 새마을호 열차를 카페로 조성한 대구 동구 금강역.

대구에는 지은 지 3년 만에 폐역이 된 비운의 역도 있다. 대구 동구 ‘금강역’은 대구선 이설로 폐역된 동촌역과 반야월역을 통합해 2005년 영업을 시작했지만 대구선 통근열차가 폐지되면서 2008년 여객 취급을 중지했다. 2013년 승차권 발매 업무를 중단하고 역무원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돼 역 기능을 잃었다. 하지만 2017년 ‘이색 카페’로 관심을 끌면서 사람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새마을호 폐열차를 개조한 레일카페가 변화를 이끈 주인공이다. 열차에 올라 커피 한잔 마시는 동안은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 된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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