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불교가 있었기에 한국불교 역사는 2000년”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가야불교 빗장을 열다’ 책 펴낸 김해 여여정사 주지 도명 스님

허황옥으로부터 전래 삼국유사서 확인
임나일본부설 조작 일제가 기록 지워
가야불교의 통불교, 원효 통불교로 계승

가야불교를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도명 스님은 “한국불교사 2000년 역사는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고 했다. 가야불교를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도명 스님은 “한국불교사 2000년 역사는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고 했다.

역사에는 더 이상 증명될 수 없는, 끝없이 증명해나가야 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그렇다와 아니다’의 경계이자, 가능성의 영역이다. 가야불교와 허황옥 설화는 역사의 심층적 본질인 ‘가능성의 영역’에 속한다. 현재로선 동시에 아니라고 할 수도, 맞는다라고 할 수도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가야불교 주장의 핵심은 한국 불교사가 ‘1600년 역사’가 아니라 ‘2000년 역사’라는 것이다. 가야불교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해 여여정사 주지 도명 스님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했다. 그는 얼마 전 〈가야불교, 빗장을 열다〉(담앤북스)라는 책을 냈고, 올봄에는 가야문화진흥원 3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가야불교를 알리는 유튜브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그를 최근 만나 ‘가야불교의 미스터리’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AD 48년 허황옥 도래에 의한 ‘가야불교 전래’의 제1 근거는 뭔가.

“13세기 고려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편찬 200년 전, 11세기에 금주지사를 지낸 한 문인이 쓴 ‘가락국기’를 인용했다. ‘가락국기’는 6세기 신라 진평왕 시대의 책 ‘개황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면면히 이어온 얘기가 거짓일 리 없다. 2019년 공주에서 백제 대통사 터가 비로소 확인됐다. 이런 예를 비롯해 〈삼국유사〉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다.”

-가장 중요한 자료인 파사석탑의 경우, 조사를 위해 해체하면서 외려 부재 일부를 유실해 원형을 훼손했다는 주장도 있어 가야불교는 더욱 미궁에 빠진 것 아닌가.

“부재를 유실했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당시 파사석탑을 조사한 분은 200일 동안 그 앞에서 명상한 뒤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 분이 부재를 유실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파사석탑을 부정하는 관점이 일종의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가야불교를 미궁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그런 시각이다.”

-허황옥으로 표상되는 김해 가락국의 왕비족은 낙랑 지역에서 도래한 2차 유이민이거나, 낙랑지역에서 김해를 수시로 왕래하던 상인 집단의 일족이었을 거라는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나. 근거는 가락국기의 ‘한사잡물(漢肆雜物)’ 같은 표현이 중국과의 교역 흔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AD 48년’이 아니라 낙랑과 김해가 교류하던 2세기 중반 이후에 허황옥이 왔을 거라는 추리다. 안 왔다는 게 아니라 그 집단의 성격과 도래 시기가 달랐다는 것이다.

“그게 강단 사학의 주된 입장이다. 그러나 시기를 충분히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기원전 시대에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이었던 사천 늑도, 최근 파괴됐다고 논란에 휩싸인 김해 ‘구산동 고인돌’을 볼 때 김해는 기원전부터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기록을 못 믿겠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허황옥 도래 설화는 김해 김씨가 만든 설화라는 견해가 있다. 신라에 귀부한 뒤 금관소경에 살면서 지방 호족으로서 흔들리는 위상을 다져야 하는 필요 속에서 ‘망산도’와 같은 주변 장소를 배치하면서 설화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 설화가 통일신라 때 시작해 고려 초기에 거의 완성됐고, 가락국기 기록으로 이어졌다는 건데 어떻게 생각하나.

“유학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 안정복을 비롯해 가야불교를 일부 폄하하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장유사중창기’ ‘은하사취운루중수기’ ‘왕산사기’ ‘김해명월사사적비’ ‘가락국장유화상기적비’ ‘가락국태조릉숭선전비’ ‘부인당유주비’ 등 많은 자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일제가 가야불교에 대한 기록을 지웠다고 본다.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깡그리 사라진 기록 탓에 가야불교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제는 기록을 삭제했으나 사람들의 구전은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가야불교 탐색 과정에서 사람들이 전하는 구전 민담 설화들이 상당한 근거를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랜 이야기가 전해온다는 것은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전은 ‘최초의 근거’를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실증’의 부분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부분은 아닐까.

“그렇다. 그 믿음을 실증으로 복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증되기 전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

-가야불교 성격은 뭔가.

“두루두루 많은 관점과 사상을 포섭한 통불교였다. 나중에 원효 통불교로 계승된다.”

-새롭게 확인한 것은.

“허황옥 신혼길 중 망산도 위치를 새로 고증했다. 현재 용원 앞 조그마한 바위섬을 망산도라고 한다. 하지만 부산신항 들어가기 전에 있는 ‘견마도’가 망산도라는 것을 새로 밝혔다. 방향과 거리를 따질 때 〈삼국유사〉 기록에 딱 들어맞는 곳이다. 〈삼국유사〉 기록은 참으로 정확하다. 일제가 근대 지도에서 이곳을 지운 흔적까지 있다. 1872년 웅천현지도를 보면 이 견마도는 ‘만산도(滿山島)’로 적혀 있다. 곧 망산도인 것이다. 견마도가 망산도라는 주장에 대해 학계 검증을 받고 싶다. 또 ‘김해명월사사적비’에 있는 신국사와 진국사 터도 확인했다. 그 터의 축대는 ‘말 없는 말’을 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글·사진=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