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우크라 점령지 합병 투표 강행… 미 “인정 못 해”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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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츠크 등 4곳서 23~27일 실시
전황 불리해지자 11월 계획 바꿔
크림반도 합병 상황 재현 노린 듯

우크라 “불법이고 조작” 거센 반발

20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거리에 친러 구호가 적힌 옥외 광고판이 걸려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거리에 친러 구호가 적힌 옥외 광고판이 걸려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점령지 4곳을 대상으로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기존 11월설을 뒤집고 조기에 주민 투표를 실시하는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거센 반격에 잇달아 점령지를 내주는 등 궁지에 몰리자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해석된다.

2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 자포리자주, 헤르손주 러시아 행정부들은 23일부터 27일까지 러시아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DPR과 LPR은 이미 친러시아 세력이 독립을 선포한 곳이다.


당초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는 11월 실시될 것으로 전망됐다. 러시아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내에서는 11월 4일에 맞춰 주민 투표를 치르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가 폴란드 지배에서 벗어난 날인 11월 4일을 국경절(국민 통합의 날)로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여가량 투표가 빨라진 데는 서방 무기를 힘입은 우크라이나의 반격과 장기화되는 대러 제재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전세 역전 등 수세에 더 몰리기 전에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국 영토로 편입되면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군사 개입도 한층 용이해진다. 우크라이나의 탈환 공세를 본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대규모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합병된)러시아 영토에 대한 침범은 모든 자위력을 동원할 수 있는 범죄”라며 주민 투표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1일 주민 투표에 지지를 표명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부분 동원령’을 발동하며 강공 모드를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가 군 동원령을 발령한 것은 세계 2차대전 이후 처음이다. 이에 따라 30만 명의 예비군 병력과 군수물자 등이 전쟁터에 강제 동원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러시아의 주민 투표가 불법인 데다 조작 가능성이 커 신뢰할 수도 없다고 맞선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앞서 주민 투표 추진에 “러시아가 가짜 주민투표를 강행할 경우 모든 대화 기회가 차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 심지어 장악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엉터리 주민투표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유엔헌장의 핵심인 주권 및 영토보전의 원칙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했다.

러시아의 이번 주민 투표 추진이 8년 전 크림반도 합병 때와 닮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시에도 미국, 유럽 등 서방의 맹비난에도 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이 96.6%에 달했다. 서방은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하지 않은 투표는 인정할 수 없다며 맞섰지만, 러시아는 합병 작업을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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