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교역 ‘양동리-북부 규슈’ → ‘대성동-기나이’로 이동[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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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3. 전기 가야와 왜

일 열도 가는 철 유통 루트 개발
대성동 세력, 김해권 권력 교체
‘구야국’서 ‘금관가야’로 전환
야마토 정권 일본 장악 후에도
북부 규슈, 한반도 중계지 역할

3세기 후엽 금관가야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김해 대성동 29호분 발굴 모습. 작은 사진은 왼쪽부터 왜의 위세품인 파형동기, 금관가야 권역에서 만들어 왜에 준 위세품이라는 통형동기. 문화재청 제공·부산일보 DB 3세기 후엽 금관가야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김해 대성동 29호분 발굴 모습. 작은 사진은 왼쪽부터 왜의 위세품인 파형동기, 금관가야 권역에서 만들어 왜에 준 위세품이라는 통형동기. 문화재청 제공·부산일보 DB

전기(前期) 가야와 왜는 아주 긴밀한 관계였다. 그 긴밀함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가야가 철이라는 막강한 전략물자를 공급해주고, 그 반대급부로 왜는 군사력을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부터 군사력 지원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철 소재, 선진 문물·기술과 인적 노동력을 교환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대사가 급물살을 타던 4세기 어느 화급한 시점에 왜의 중심세력인 야마토 정권은 주변 수장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가야의 철과 고급한 기술이 긴요해졌고, 가야도 낙동강 유역을 둘러싼 신라와의 쟁패에서 반대급부로 군사력 지원을 요구했을 거라는 시각이다.


우선 전기 가야와 왜의 관계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아우른 2개 축과 관련돼 있다. 그 양대 축은 ‘백제-가야-왜’와 ‘고구려-신라’가 각축하던 축이다. 존속기간을 볼 때 전자는 길었고, 후자는 짧았다. ‘고구려-신라’ 축은 백제에 맞서기 위해 70~80년 정도 이어졌다. 그에 반해 ‘백제-가야-왜’ 축은 몇백 년 지속하면서 일본 고대사를 촉진하고 형성했다.

‘백제-가야-왜’ 축을 통해 왜에 선진 문물 통로가 됐던 것은 처음에는 가야였고, 나중에는 백제였다. 가야와 백제가 아예 일본 고대사를 형성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여하튼 전기 가야-왜는 가장 일찍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전기 가야는 400년 광개토왕 남정(南征) 이전까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김해 권역의 금관가야와 그 전신인 구야국을 말한다.

전기 가야와 왜의 밀접한 관계가 더욱 긴밀하게 변화한 것은 3세기 후엽~4세기 초였다. 당시 역사적 격동은 고구려에 의한 낙랑(313)과 대방(314), 2군(郡)의 멸망이었다. 안 그래도 중국의 혼란으로 낙랑·대방 쪽 장력이 약해져 있었는데 2군의 멸망으로 전기 가야-왜의 교역 체계는 역사 전면에 부상한다.

먼저 전기 가야에 판도 변화가 야기됐다. 2군의 약화·멸망과 함께 김해 권역 중심이 ‘양동리 세력(양동리 고분군)’에서 ‘대성동 세력(대성동 고분군)’으로 이동했다. 양동리 세력은 중국과의 교역에 더 많이 치중했을 것이다. 당연히 대성동 세력은 대단한 중국·북방계 유물도 갖추면서 왜와의 교역에 더 치중해 그 힘을 키웠다. 낙랑 대방이 약화하던 3세기 후엽에 이미 금관가야 왕의 무덤인 대성동 29호분이 축조됐다. 학계에서는 대성동 세력이 일본 열도로 가는 새로운 철 유통 루트를 개발하면서 부상했다고 보고 있다. 양동리 세력에서 대성동 세력으로의 교체를 ‘구야국’에서 ‘금관가야’로의 전환이라 말하기도 한다.

일본 열도 왜의 판도도 다변화된다. 대성동 세력의 부상과 연동됐던 것이다. 애초 일본 열도의 교역 중심은 북부 규슈 세력이었다. 북부 규슈가 한반도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세기 중반 이후 오사카 평원의 기나이(畿內) 지역에 야마토 정권이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일본 열도는 철기 자극에 의해 그 판도가 요동하면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고훈시대(古墳時代)로 접어들었다. 그 시대 추이에 따라 전기 가야-왜의 중심 교역은 ‘양동리-북부 규슈’에서 ‘대성동-기나이’로 변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왜의 상황은 복잡하고 중첩적이었다. 야마토 정권이 중심으로 부상했다고 북부 규슈 세력이 몰락한 것은 아니다. 기나이 야마토 정권은 핵심적인 교역을 진행했고, 북부 규슈는 여전히 한반도 교역의 주요 창구, 중계지 역할을 맡았다. 주목할 대목이 있다. 3세기 후반~5세기 전엽 부산 김해 등 영남 지방 생활유적과 고분에서 규슈계 하지키(土師器) 토기가 다수 출토되는데 이는 규슈 사람들이 교역을 위해 금관가야 권역에 건너와 거주한 흔적이다. 금관가야와 북부 규슈는 고대 국가의 경계 형성 전에 사람과 노동력이 오가는 일종의 자유무역 연합을 이뤘다는 것이다.

중심 세력인 대성동 금관가야 세력과 기나이 야마토 세력의 교역 상징물은 촉형석제품 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저 유명한 파형동기(巴形銅器·바람개비 모양 청동 장식품)다. 일본 열도 고훈시대 왕 무덤에서 발굴되는 파형동기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성동 고분군에서만 22점이 출토됐다. 금관가야가 야마토 세력에게 우수한 철기 기술을 전수한 대가로 받은 위세품이다. 이를테면 이른바 군사적 전권의 표식인 병부 같은 파형동기와 외교 군사적 교류가 연관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전기 가야와 왜, 즉 금관가야와 야마토 정권의 교류는 예사롭지 않았다. 야마토 정권이 일본 열도를 장악할 수 있는 강력한 철기를 공급받는 반대급부로 제공한 군사력에 의해 ‘가야-왜 연합군’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신라를 공격한 가야-왜 연합군 흔적은 광개토왕 비문에 기록돼 있다.

금관가야 대성동 세력이 왜와 교류할 때 야마토 정권 내부에서도 주도권 이동이 있었다. 기나이 중앙 정권 안에서도 야마토 동남부 세력이 처음 두각을 나타냈으나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 야마토 북부 세력과 가와치 평야 세력(古市·百舌鳥古墳群)이 신흥세력으로 주도권을 획득했다. 이런 변화가 금관가야와 연동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수께끼 세기’라 일컫는 일본 고대사 4세기 속에 전기 가야와 왜의 매우 긴밀한 관계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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