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도 ‘산해경’처럼 전 세계인 상상력 자극하는 신화가 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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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신들의 귀환/정재서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동양의 전통신화에서 나오는 요괴 캐릭터를 각색한 것이다. 부산일보DB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동양의 전통신화에서 나오는 요괴 캐릭터를 각색한 것이다. 부산일보DB

그리스 로마 신화 중심주의 탈피

동양의 전통신화 새롭게 조명


동서양 신화 각자 고유성 지녀

다양성 존중 상상력 풍요롭게 해야


영화 ‘아바타’에는 기원전 5000년경에 존재했던 수메르의 창조 신화, 수천 년 전의 인도 신화, 500년 전의 이야기인 포카혼타스 등 여러 나라의 스토리가 영화 안에 녹아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 ‘해리 포터’의 소재는 켈트신화에 뿌리를 둔 중세 마법 이야기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동양의 전통신화에서 나오는 요괴 캐릭터를 각색한 것이다.

오늘날 문화산업에서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신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인간의 원형이 담겨 있는 신화는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상상력과 이미지, 스토리의 보물창고이다. 이성 중심의 근대가 지나가고 탈근대로 넘어오면서 그동안 이성에 의해 억압되었던 상상력, 스토리, 이미지 등이 자연스럽게 부활하자 신화가 다시 재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제외하곤 제대로 아는 신화가 없고 특히 동양신화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서양은 르네상스 이후로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 <일리아드>를 비롯해 신화의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문화, 예술적으로 각색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동양에서는 신화적인 상상력이나 스토리, 이미지들을 이단적으로 생각해서 배척하는 등 신화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작업이 매우 미흡했다.

신화학자·중문학자이자 영산대 석좌교수인 저자는 <사라진 신들의 귀환>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중심의 상상력을 탈피해 동서양 통합의 상상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라진 신들’이란 그리스 로마 신화 중심주의에 의해 밀려난 동양의 신들을 의미한다.


<사라진 신들의 귀환> 표지 <사라진 신들의 귀환> 표지

저자는 일찍이 동양신화의 대표적인 고전인 <산해경>을 번역, 소개해 동양적 상상력의 화두를 던진 바 있다. 현재 전해지는 <산해경>은 전한의 유흠(기원전 53년~기원후 23년)에 의해 정리되어 오늘날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산해경>은 ‘산과 바다의 경전’으로 고대 중국과 그 영역을 둘러싼 산과 바다의 풍속과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실 공간뿐만 아니라 신화적·상상적 공간도 겹쳐 있다. 모두 18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산경은 447개소의 산들에 대해 산천의 형세를 말한 다음 산출되는 광물, 동식물, 특이한 괴물과 신령에 대해 서술했다. 해당 지역의 민속, 종교, 신화 등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해경은 산경보다 더 강렬한 신화적 색채를 띤다. 해경은 크게 해외경, 해내경, 대황경 등 3부작으로 나뉘어 있다. 이국의 풍속, 영웅의 행적, 신들의 계보, 괴물에 대한 묘사 등으로 가득해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책은 명대의 소설로 환상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서유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도연명은 ‘독산해경’ 13수에서 <산해경>의 신화 모티프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산해경>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왔으며 오늘날에는 보르헤스의 작품에서도 <산해경>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산해경>은 과거의 화석도, 중국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해 모든 인류에게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근원적 상징 그 자체다. 동양에도 이처럼 전 세계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빼어난 신화가 있는 셈이다.

신화는 저마다의 풍토와 고유한 민족성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종족에 따라, 문화적인 토양에 따라 신화는 강조하는 내용과 표현하는 양식이 달라진다. 한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유래했는데 이 신화는 지중해 연안 민족들에게는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콤플렉스가 우리나라, 중국 등 동양에서는 유교 문화 풍토와 종족적 특성으로 볼 때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현재 인간의 보편적인 콤플렉스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학자들은 그것을 원용해 모든 문화를 해석한다. 저자는 이를 굉장히 독선적인 시각이라고 일갈한다. 특정한 지역과 특정한 종족의 신화에서 생겨난 콤플렉스로 신화적 풍토가 다른 종족의 문화를 무차별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동양신화의 정체성을 먼저 이해한 후 다른 나라의 신화를 함께 보면서 인류의 보편성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저자는 스토리와 상상력이 특정한 지역, 특정한 종족의 그것으로 획일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스토리와 상상력의 원조인 신화를 통해 차이점을 사유해보고 상대방 문화에 대한 공존적·호혜적 차원의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동서양의 창조 신화를 통해 서로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동서양의 일부 창조신화는 거인의 신체가 변화하여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른바 ‘거인신체화생’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다. 인도의 푸루샤로부터 게르만의 이미르에 이르기까지 인도-유러피언 계통의 거인신화에서는 다른 신들이 거인을 살해한 후 신체를 절단하거나 해체해 산과 강, 숲 등 세상을 창조한다. 반면 혼돈 속에서 태어난 중국의 거인 반고는 몇만 년을 혼자 살다가 자연사한다. 죽음 후에 그의 몸은 각 부분이 저절로 산과 강, 숲으로 변화한다. 두 신화의 차이는 흥미롭다. 첫째, 창조의 동력이 서양은 살해이고 동양은 자연사라는 점이다. 둘째, 창조의 방식이 서양은 절단을 통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동양은 통째로인 몸 상태에서의 변모이다. 서양의 분석적 사고와 동양의 전일적, 통합적 사고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동서양 신화는 풍토, 종족 등의 차이로 출발부터 각자의 고유성을 지녔다. 저자는 “이러한 고유성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읽는 다양한 관점으로 존중되어 스토리와 상상력을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재서 지음/문학동네/344쪽/2만 원.


영화 ‘반지의 제왕’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부산일보DB 영화 ‘반지의 제왕’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부산일보DB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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