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통 큰 결단…'따뜻한 가슴'으로 마무리하라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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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호 서울정치팀 부장

국익 위해 불가피했던 일제 강제징용 해법
19년전 노무현-고이즈미 회담 되돌아봐야
대통령이 직접 피해자 만나 손 잡는 기회를

문제 : 다음 기사에서 ○에 들어갈 사람 이름과 □에 들어갈 당명은?

‘○ 대통령은 한·일정상회담 뒤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양국 국민 정서가 서로 다른 한 양국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어떤 합의를 내리기가 어렵다”며 “이 때문에 제 임기동안에는 공식 의제로나 공식 쟁점으로는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대통령은 또 “역사적 진실에 대해 서로 합의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나 미래를 위해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일본의 호응을 요구했다.

○ 대통령은 이어 “독일의 아데나워 전 총리가 서유럽과의 관계를 풀었고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동유럽과의 관계를 해결해 지금은 유럽질서를 주도하고 있다”며 과거의 사례를 들었다.

그러자 □당은 일본의 사과와 보상 등 과거사에 대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 대통령을 비판했다. A 최고위원은 “○ 대통령의 발언은 국가원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국내에선 오기정치를 하면서 밖에선 굴욕외교를 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B 정책위의장은 “관계국가의 잘못된 역사적 문제에 대해선 따질 것은 따지고 내부적으로 국론을 통합해 힘을 결집하는 것이 국익을 위한 길인데도 ○ 대통령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은 윤석열 대통령이고, □는 더불어민주당이 정답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이 기사는 2004년 7월 23일 부산일보에 게재된 것이다. ○은 노무현 대통령, □는 한나라당이 정답이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미래통합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전신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2004년 7월 21~22일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간 협력 관계 증진을 다짐하면서 역사문제를 비롯한 두 나라 사이의 현안에 대해 조금이나마 간극을 좁혔다.

그로부터 19년이 흐른 지난 16일 윤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한·일관계에서 있어서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윤 대통령의 발언과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여러모로 맥락이 닿아있다. ‘과거사 해결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던 한나라당의 비판은, 이번 정상회담을 ‘신(新)을사조약에 버금가는 굴욕외교’라고 총공세를 펴고 있는 민주당과 빼닮았다.

19년이 지났지만 정권만 달라졌지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미래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과 여야는 예전에 가졌던 자신들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야당은 미·중 전략 경쟁, 공급망 위기, 북한 핵 위협 고도화 등 복합 위기 속에서 한·일 협력의 필요성이 더 커졌고, 결국 일본 측의 제대로 된 사과나 배상 약속 없이 강제징용 해법을 우리가 먼저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을 이해해야 한다. 정부 여당은 과거 야당 시절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가졌던 유화적인 자세에 섭섭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지금 야당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국익 외교에 협조할 수 있도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눈에 뻔히 보이는 반발을 무릅쓰고 국익과 미래를 위해 결단했다는 윤 대통령이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 한가지 더 남았다는 점이다. 그건 바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보듬고 껴안는 일이다.

2018년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 승소자는 15명이었고, 그 중 3명이 생존해있다. 이 분들은 모두 90세가 넘은 고령이고 생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그건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국정의 최종 책임자로서 일본의 사과보다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대외적으로 이를 번복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 대목에서 윤 대통령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이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진솔한 자리를 가져야 한다. 한·일 청구권 협정과 대법원 판결, 그로부터 파행된 여러 문제를 떠나서 이 분들에게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아쉬울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만나 손을 잡아주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를 상당부분 치유할 수 있다고 본다. 한·일 관계 미래를 위해 윤 대통령은 냉철한 머리로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따뜻한 가슴으로 그 결단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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