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인공지능과 과로사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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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전략국장

근로 시간 연장 논란 와중에
생성 AI, 일자리 공세 시작
MS 오피스에 챗GPT 적용
문장이 순식간에 ppt 변환
노동의 미래에 거대 충격파
일자리도 각자도생 시작

길항 관계여야 할 두 개념이 요즘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엉킨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혼란과 불안감이 교차해서 뒤숭숭하다.

‘피곤을 모르는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빼앗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을 예견한 게 지난 1995년,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기술 혁신이 일자리를 사라지게 해 미래 사회는 유토피아의 반대편 디스토피아로 떨어질 것이라는 진단이다. 틀리고 맞고를 떠나, AI 기술 도입과 자동화로 일단 과로사는 사라졌어야 했다.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도 일자리의 변화, 근로 시간의 단축을 논의하는 ‘일의 미래’는 단골 주제다. 지난해에는 주 4일제까지 의제로 다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장시간 노동이 현재 진행형이어서다.

영어권 뉴스에서 ‘karoshi’(일본어 ‘과로사’ 발음의 영어 표기)가 처음 등장한 건 1987년이다. 영어 뜻풀이는 ‘(일본에서)초과 근무로 기인된 사망’(death caused by overwork). 그해 일본 정부는 과로사 문제를 공식 인정하고 노동법을 개정해 장시간 노동을 금지하는 대책을 내놨다.

잘 살아 보려고 다니는 직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다니! 개인주의와 웰빙을 추구하는 서구 사회에 문화 충격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과로사 사례를 조사했다. 주 110시간 근무한 과자 공장 근로자(34세)와 월 5회 34시간씩 연속 근무한 간호사(22세) 심장마비 사망…. 사례는 부지기수다.

문제는 ‘karoshi’가 죽은 단어가 되지 못하고 아직 살아 있다는 데 있다.

일본 노동기준법이 규정한 기준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이다. 그런데 ‘36협정’이라는 조항을 두어 노사 합의로 예외적으로 연장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예외의 예외’ 식으로 규정이 남용되는 바람에 과로사는 여전히 고질적이다. 로봇 최강국 일본에서 장시간 노동이 횡행한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급기야 후생노동성은 ‘장시간 근무 삭감 추진 본부’까지 만들었다.

강 건너 불구경 할 일이 아니어서 무참하다. 외신에서 ‘karoshi’의 대체 단어로 ‘gwarosa’(과로사)가 등장했다.

‘근로 시간 단축이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지만 적어도 한 국가는 추세를 따르지 않고 있다.’

한국 발 CNN 기사는 주당 최장 노동 시간을 69시간으로 늘리려는 한국 정부를 꼬집으며 ‘gwarosa’에 ‘karoshi’와 같은 뜻풀이(death by overwork)를 붙였다.

‘제도보다 노동 관행의 개선, 일하는 방식 혁신, 노동 시간 유연화로 선택권 부여….’

법 개정 취지는 이상적일 뿐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노동 시장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갑을 관계가 바뀌지 않은 조건이라면 그 규정은 일본에서처럼 ‘예외의 예외’ 식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한국은 노조 조직률이 14%에 불과해 절대 다수 임금 노동자는 단체 협상과 행동권에 제약을 받는다. 비숙련·저임금 계층, 주로 청년과 여성, 장애인, 노년층이 취약하다. 선택할 위치에 있지 않고 선택을 당하는 처지는 어디서나 괴롭다.

AI 전성시대에 과로사를 걱정해야 하는 게 가당하기나 한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AI의 일자리 공세는 전방위적으로 시작됐다.

요즘 전 세계 임금 생활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단연 생성형 AI다. 챗GPT로 촉발된 일자리의 지각 변동은 그 방향과 속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 16일 마이크로소프트(MS)는 생성 AI를 탑재한 파워포인트, 워드, 엑셀을 공개했다. MS 오피스365에 챗GPT가 적용된 이른바 ‘코파일럿’이다. 명령어, 즉 프롬프트(prompt)에 따라 문장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로 휘리릭 바뀐다. 엑셀 매출표는 순식간에 분기 요약 보고서로 요약되어 나왔다. 챗GPT에 놀랐고, 그 기술이 적용된 MS 빙(Bing) 검색 서비스에 충격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지금까지는 약과였다.

“이제 잡무(drudgery)를 그만 두고 창의적인 일에 시간을 사용하세요!”

‘코파일럿’ 발표에 ‘일의 미래’(future of work)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묘하게도 시연을 보는 내내 ‘노동의 종말’이 겹쳐 떠올라 모골이 송연했다. 대량 정리해고 통보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과거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미래는 벌써 와 있다. 현재는 과로사와 AI가 일으키는 거대한 삼각 파도에 휩싸여 있다. 이를 뚫고 나가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간이 시작됐다.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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