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스마트폰 뱅크런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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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국가 부도 사태’로 온 나라가 파산과 실직으로 어려움을 겪고, 동남은행과 종금사 등 지역 금융업계도 속속 문을 닫았다. 그 틈을 비집고 파이낸스 회사가 독버섯처럼 생겨났다. 파이낸스 회사는 유명 배우와 가수, 축구단까지 내세워 ‘확정배당률 연 30~40%, 목표수익률 연 120%, 위험률 0%’를 약속했다.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은 1999년 9월 삼부파이낸스, 청구파이낸스가 영업을 중단하면서 예금자들이 파이낸스 회사 앞에 줄을 서는 뱅크런(Bank Run·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이 터졌다. 2조 6000억 원가량을 맡긴 7만 5000여 명이 8200여억 원을 날렸다. 지역 최대의 금융 사기극이었다.

그 후 10여 년 만인 2011년 부산저축은행 등에 뱅크런이 벌어졌다. 영업정지처분이 내려질 것을 미리 안 예금채권자들이 급히 거액의 예금을 인출하면서 저축은행 30여 곳이 파산했다. 부동산 경기 호황 속에서 부동산PF 대출에 뛰어들었던 저축은행이 금융위기로 인해 건설업체들이 부도가 나면서 파국을 맞은 것이다.

이런 뱅크런 사태가 최근 미국에서 벌어졌다. 미국 내 자산 기준 16위 규모의 40년 된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기까지 단 36시간이 걸렸다. 유동성 위기로 증자 계획을 발표하는 순간, 공포 심리가 전염되면서 예금주들이 스마트폰으로 예금을 대거 인출했다. 은행으로 뛰어가 줄을 서는 모습은 없었지만,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돈줄로 불리던 SVB에선 하루 만에 56조 원(420억 달러)이 빠져나갔다. ‘스마트폰 뱅크런’의 시작이었다.

스마트폰 뱅킹과 SNS 사용의 대중화가 은행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은행 폐쇄에 이르는 속도를 경이적으로 증가시킨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작은 불안감과 루머, 집단 공포심리가 SNS를 통한 초연결사회에서 빛의 속도로 증폭되고, 스마트폰의 모바일앱 클릭 몇 번으로 실시간 ‘원격 뱅크런’이 가능하게 됐다. 대형은행도 단 몇 시간 만에 파산 위기에 처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금융 전문가들마저 “이렇게까지 빨리 망할 줄 몰랐다”라고 놀라워할 정도다.

스마트폰 사용률 세계 1위로 은행 업무의 90%가 모바일로 이뤄지는 한국에서도 금융회사의 스마트폰 뱅크런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금융기관이 고객의 수익성과 함께 경영 건전성, 고객의 신뢰 확보에 보다 더 민감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된 셈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견고함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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