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나무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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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올해는 유독 벚꽃이 일찍 피더니 그만큼 빨리 떨어져버린 것 같아 마음이 못내 서운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서관의 창밖에는 벚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작년 이맘때와는 달리 벌써 꽃이 다 사라져 버리고 연녹색 잎들만 바람에 흔들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시기적으로 좀 이를 뿐, 꽃이 피고 지는 일, 새 잎이 났다가 떨어지는 일 같은 것은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마지막 잎새’처럼 벽에다가 진짜 같은 그림을 그려놓을 수 없을 바에야 그저 내년 봄의 개화를 기다릴 수밖에.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순환이야 이처럼 순순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만, 길을 걷다 나무들을 볼 때면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실은 서운함을 넘어서 괴롭고 화가 나기까지 하는 장면인데, 그건 바로 참수를 당한 듯 줄기 윗부분이 뎅강뎅강 잘려나간 나무들의 모습이다. 아파트 화단, 그리고 거리의 가로수들. 보기에 흉측하고 민망할 만큼 무참히 절단하는 그 행위를 가지치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조경이라기보다는 폭력, 가지치기라기보다는 참수라는 말이 더 정확해 보인다. 우리 아파트 화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목련나무들은 굵은 가지가 모조리 잘려버려 꽃도 거의 피우지 못했다. 하얀 전구처럼 밤에도 빛나는 그 크고 탐스런 꽃을, 나는 잘려나간 가지의 빈자리에 눈으로 그려보았다. 어차피 우리도 모두 한 줌 먼지가 되고 말 존재들인데, 인간이라는 하찮은 특권의식으로 다른 생명체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해졌다.

물론 나는 조경에 대해, 도심에서 이루어지는 전지 작업의 매뉴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작업을 하는 분들에게도 나름의 이유와 고충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이를테면 일조권과 관련된 민원이라든지, 꽃가루와 관련된 민원이라든지, 새똥과 관련된 민원이라든지, 민원, 민원, 민원…. 그래, 민원은 무섭고 귀찮은 것이다. 꽃과 나무와 새들은 민원을 넣지 않으니까 뎅강, 하고 쉽게 잘라버릴 수 있었을까? 이 땅에서는 오직 인간이, 인간의 편의와 이익만이 중요하니까.

게다가 우리는 이중적이기까지 하다. 산을 헐어 아파트를 지어놓고 그 와중에도 자연은 누리고 싶어서 화단을 조성하더니, 나무를 심어놓은 목적이 무색해질 만큼 과도한 가지치기를 해서 그들을 도심의 흉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 그 나무들 곁을 지날 때면 팔 없는 귀신들이 기다란 그림자처럼 쫓아오며 내 팔을 내놓으라고 구슬프게 흐느끼는 것만 같다.

가지치기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적정한 수준의 가지치기는 수형을 아름답게 하고 나무의 건강한 성장을 돕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닭발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흉하게 변해버린 나무를 보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싶어 좀 속상하다. 그럴 것 같으면 애초에 작은 나무를 심거나 건물과 충분한 거리를 둔 채 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 정도는 예측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마음만 먹으면 뭐든 없앨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진 인간인데 말이다.

무성한 잎을 피우지 못하게 된 그 나무들은 광합성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잘린 절단면에 생긴 상처는 썩어버리거나 병해충이 생겨 결국 고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나무들은 지금 고통에 신음하며 우리가 볼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오감으로 그 눈물을 볼 수는 없지만 상상은 할 수 있다. 우리와 다른 감각, 우리와 다른 언어를 가진 이종(異種)의 존재에게도 감정을 이입하고 그들의 고통마저 껴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야말로 우리는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밀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잘라버리는 능력 따위가 아니라 말이다. ‘나무는 땅이 하늘로 쓰는 한 편의 시’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이 애달프게 마음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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