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청년의 슬픈 초상, 안나와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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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영화 ‘다음 소희’ 한 장면.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한 장면.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안나는 길거리에서 동사한 성냥팔이 소녀의 이름이다. 날이 저물어 칼바람은 매서운데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행이 두려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손을 녹이려 켠 성냥불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성찬의 환상이 펼쳐지는 가운데 생명은 별똥별처럼 스러진다. 안데르센 동화다. 현실은 동화보다 잔혹하다. 산업혁명기 런던의 성냥공장에서는 값싼 임금으로 어린 소녀들을 고용했다. 원료인 백린은 독성 물질이다. 턱뼈가 무너져내리고 얼굴이 짓이겨진다. 산재를 입고 해고당한 소녀들이 성냥을 파는 행위는 구걸과 다름없다. 공장주는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 가내수공업자에게 일감을 떼어 주기도 했다. 식구들이 독성 물질에 노출되거나 사고로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위험의 외주화다.

소희는 대기업 하청회사에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고생의 이름이다. 영화 〈다음 소희〉 이야기다. 이동통신사 해지방어팀 콜센터 업무는 열여덟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가혹한 감정노동이었다. 폭언과 욕설은 백린만큼이나 유해했다. 가슴이 무너져내리고 영혼은 짓이겨졌다. 비현실적인 실적 압박과 실습생에 대한 착취는 말해 무엇하랴.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 소희야, 버텨야 된다잉.” 취업률이 곧 존폐의 조건인 학교에도 소희가 돌아갈 자리는 없다. 어느 누구도 소희의 죽음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대기업 관리자와 콜센터 대표는 문제 학생을 보낸 학교에 책임을 돌리고, 교육청 역시 자기 소관이 아니라 한다. 죽음의 외주화다.

근대 영국이나 오늘날 우리나라 노동자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품처럼 대체 가능한 노동자는 일하다 다치고, 일하다 아프고, 심지어 일하다 죽는다. 특히 청년 노동자는 가장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추락과 압착, 질식과 폭발사고로 죽음이 반복된다. 소희의 비극처럼 사회구조적 문제인데도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열정페이를 강요하거나 긱경제 플랫폼 노동과 같은 노동방식의 왜곡과 변질도 문제다. 노동의 정당한 보상 대신 착취와 폭력의 구조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위험과 죽음의 외주화가 초래하는 삶의 비극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이즈음 지역균형발전이니 지역을 살릴 청년일자리 창출이니 여전히 소란스럽다. 오늘도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대가로 삶의 곳곳에서 피와 땀, 눈물을 흘리며 고투하고 있는 숱한 안나와 소희를 만난다. 이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제쳐두더라도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무겁게 내디뎌야 한다. 노동은 무엇인가, 노동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잰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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