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루틴’한 일 처리가 낳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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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너무 익숙해서 아무 생각 없는 상태
루틴에 빠지면 변화와 도전 불가능

“이 정도로는 별 탈 없겠지…”
안이한 생각이 최근 폭우 피해 키워

행정 역량도 변화 상황에 대처하는
능동적 사고와 행동력 갖춰야 할 때

대개 ‘루틴(routine)’이라는 영어 단어를 ‘일상’이나 ‘습관’이라는 한국말로 바꾸어 쓰곤 한다. 그럼에도 ‘루틴하게 흘러가는 일상’이라는 표현을 듣거나 쓸 때가 많다. 그럴 때 ‘루틴’이라는 단어에는 평범한 ‘일상’이나 별생각 없이 그냥 하는 ‘습관’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루틴은 지루할 만큼 익숙해서 다른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어떤 상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치 여름에 비가 오고 겨울에 눈이 오는 것처럼 당연해서 별다른 대책이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 말이다.

루틴에 빠지면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가 생겨나기 어렵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으니 올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 올해 닥칠 새로운 일들을 알맞게 대응하기 어렵다. 얼마 전 경북과 충청 지방을 강타한 홍수 피해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비가 한두 번 온 것도 아니고, 작년처럼 올해도 지나가지 않을까? 이런 안일한 생각과 루틴화된 일 처리가 올해 비 피해를 더 크게 키웠다고 생각한다.


루틴이 무서운 건, 아무리 세게 울리는 경고음도 듣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5일 충북 오송에서 폭우로 미호강 제방이 터져 지하차도가 침수되면서 1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고 아직도 수색 작업이 진행 중이다. 사고 전에 이미 많은 경보가 울렸다. 작년에 포항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 침수되어 7명이 숨지는 뼈아픈 사건을 겪었는데, 올해는 예년에 비해 더 심각한 비 피해가 예고되었다. 비 오는 날에 제방 옆 지하 주차장이나 지하차도가 위험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오송시는 ‘예방’은커녕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았다. 비단 오송시뿐만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핑계가 있을 수 있지만, 책임자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건 ‘우리 지역은 괜찮겠지’ ‘이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하는 고착화되고 보수적인 생각들이다.

루틴화된 생각에서 벗어나 더 섬세하고 사려 깊게 고민하면 ‘대책’이란 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비 피해가 예고되었을 때 기존 방식대로 예방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기에 더해 최근에 벌어진 비슷한 사례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대비책 마련에 활용해야 한다. 강수량은 이미 충분히 예상되었으니 그에 따라 비 피해가 얼마나 일어날지, 지역별 지형 특징상 문제는 없는지, 사전에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어야 했다. 제한되어 있는 상상력이 결국 이런 안타까운 참사를 만들었다고 본다.

이번 참사가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기 2시간 전, 금강홍수통제소가 미호천 제방의 범람 위험을 알렸지만 관할 구청은 지하차도에 대한 차량 통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제방이 무너지기 전까지 위험 수위에 이르지 않아서”였다. ‘사고’는 예측 범위를 벗어나 매뉴얼 밖에서 벌어지니까 사고다. 매뉴얼은 모든 변수들을 포괄하지 못한다. 이때 필요한 건 루틴화된 업무 처리나 생각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고방식이다.

루틴화된 일 처리에서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운동선수들은 슬럼프를 겪을 때 그동안 자신이 만들어 온 루틴을 따르되 새로운 변화를 경험한다고 한다. 다른 장소, 다른 음식, 다른 일을 찾아서 새로운 자극으로 감각을 깨운다는 뜻이다. 여기서 ‘루틴’은 매뉴얼이 될 수 있고, ‘변화’는 매년 달라지는 기후 상황과 현상들을 반영해서 마련되는 ‘언제나 새로워질 수 있는’ 대응책이다. 반복되는 행정력에 기대지 말고 1년 쓰고 버릴 대응책이라도 매년 새로워질 수 있는 대책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건 더 이상 행정력 낭비가 아닌 듯하다.

이번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계기로 다양한 문제점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정부가 지하 주차장과 반지하 대책에 몰두했지만 치수 사업 등의 근본적인 과제는 해결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물난리가 계속된 충북의 경우는 그동안 하천 재해예방 예산을 줄여 온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가 한 번 나면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가 함께 떠오르고 결국 ‘인재’였다는 결말을 맞는다. 작년 이태원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사고가 발생하면 매뉴얼이 재정비되고 새로운 대책이 마련되는 패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죽는다는 데 있다. 사후 대책들이 아무리 쏟아져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안일한 행정과 책임자들의 미흡한 대처가 비극을 부른다는 걸 다시금 실감한다. 재작년과 작년이 같아도 올해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우린 이걸 더 이상 목숨값을 지불하며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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