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기비사~구포 아우르는 동평현에 큰 상인 세력 있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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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부산역사 학술대회’
고려시대 역사와 문화 조명
구포 거점 덕천동 세력
낙동강 하구서 대일교역 주도
온천동 차밭골 유적은
‘별장 vs 관아 시설’ 쟁점

지난달 28일 부산시청에서 열린 ‘최신 자료로 본 고려시대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지난달 28일 부산시청에서 열린 ‘최신 자료로 본 고려시대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고려시대 부산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지난달 28일 부산시가 시청 1층 대회의실에서 열었던 2023 부산역사 학술대회 ‘최신 자료로 본 고려시대 역사와 문화’는 4시간이 훌쩍 넘는 4건의 주제발표와 토론을 통해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고려시대 부산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과 논점을 펼쳐냈다.

먼저 만덕동 사지와 구포를 아우르는 동평현의 모습이 박진감 있게 제시됐다. 전국적인 조운 체제를 비로소 갖춘 고려시대에 낙동강 하구는 물류 집산지였다. 특히 200년간 금주객관(부산 강서구 녹산동)이 존재한 대일교역의 거점이었다. ‘동남해도부서’가 있던 김해뿐 아니라 부산 구포 일대에도 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평현에 속하는 만덕동 사지(기비사)와 송선사지-감동포(구포)-덕천동 유적을 연결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지점은 동래와 김해를 잇는 주요 통로이자 거점이었다. ‘부산지역 고려 사원지와 불교문화’를 주제발표한 최연주 동의대 교수는 “기비사와 송선사 터는 1㎞ 정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는데, 기비사가 불교국가 고려에서 지방 특성에 맞게 국가 통치 기능을 수행하는 창구로서 황실급 위계를 지닌 대사원이었다면, 송선사는 오가는 많은 이들이 묶는 원(院)의 역할을 한 기비사 부속기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기비사와 송선사는 기비현(만덕고개)을 통해 동래로 연결되는 한편, ‘배와 수레가 닿는 곳마다 탑과 사당이 서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고려 말 최해의 표현처럼 덕천동 유적과 감동포가 있는 낙동강과 곧바로 이어지는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래현과 동평현의 조세는 감동포에서 일직선상의 김해 불암창, 주촌 성내역 등 금주도(金州道)를 통해 합포 석두창까지 이송됐다”고 했다.

최 교수는 ”구포를 거점으로 하는 ‘덕천동 세력’(덕천동 유적)은 김해지역 세력과 함께 대일교역을 주도하면서 이익을 취한 상인 집단이었다“고 했다. 이들이 기비사와 용당동 유적에서 출토된 고급 청자를 부산에 유입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05년 발굴된 용당동 유적은 ‘월천사(月天寺)’ 등 명문이 나온 사회적 위상이 높은 사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최 교수는 “동평현 향리와 토호들은 낙동강 하구 및 남해 연안의 수산자원을 매개로 상당한 경제활동을 펼쳤고, 금주객관 등지에서 대일교역을 주도하면서 부를 축적했다”고 했다. 그들은 축적한 부로 강진산 고급 청자를 소비하면서 기비사와 용당동 사찰에 시납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부산의 행정구역. 신은제 제공 고려시대 부산의 행정구역. 신은제 제공

동평현 향리들은 또한 80여 자 명문이 남아있는 ‘선악사 동종’ 불사(고려 문종 20년, 1066년)를 주도했다고 한다. 동평 이씨로 보이는 호장 득의(得意)와 주백(周伯)이 불사를 주도한 동평현 토호이며, 동평현의 향·부곡 향리들과 백성들이 동종 불사에 시주했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만덕고개 너머 동래현의 온천동 차밭골 유적(119부산안전체험관) 성격에 대한 얘기들이 오갔다. 2013~2014년 건물터 8곳 등을 확인한 이 유적에 대해 구산우 창원대 교수는 지난해 <항도부산> 43권을 통해 “차밭골 유적은 동래 수령이 과거급제자나 병마사를 맞이하던 관아 부속시설인 오리정(五里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러나 이날 ‘부산지역 고려유적의 발굴성과와 과제’를 주제발표한 신은제 창원대 교수는 “동래 치소에서 5㎞ 떨어진 교외인 이곳은 동래정씨가 운영하던 별장(別墅, 別業)으로 보여진다”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 이곳 명문 기와에서 확인된 이름인 ‘정자혁’과 ‘정해’가 동래정씨로 차밭골 별장의 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놨다. 홍영의 국민대 교수(‘부산지역 고려유적 출토 명문 기와의 성격’)는 “정자혁과 정해는 호장이면서 동정(同正, 일정한 직무가 없는 관직)직을 겸한 이들인데 이중 정해는 동래정씨 중시조 정지원의 11대로 확인된다”고 했다.

하지만 청중석에 앉았던 구산우 교수는 “둘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 기와는 망미동 동래고읍성 발굴에서도 똑같이 확인됐기 때문에 둘은 별장 주인이 아니라 백성과 군사를 동원해 공사를 지휘한 이들”이라며 “역시 차밭골 유적은 오리정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신은제 교수는 “12~13세기 부산의 고려시대 유적은 녹산동 요지, 덕천동 고분군, 차밭골 유적, 용당동 유적 등으로 상당하다”며 “그러나 13세기 말~14세기 고려시대 유적은 쇠락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그것은 삼별초 항쟁과 일본 원정, 왜구 창궐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세진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부산지역 고려유적 출토 청자의 현황과 특징’ 주제발표를 통해 “부산에서는 고려 중기까지 청자 제작 기술 유입이 더디다가 고려 후기에 상감청자 출토 비율이 증가하고 있어 이때 재지 세력 위상이 신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날 토론 좌장을 맡은 김기섭 부산대 교수는 “2000년 이후 부산 고려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 성과가 축적되고 있어 기대된다”며 “양적 질적으로 미흡했던 고려시대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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