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눈치 보여서” “입주민 아니라서”… 문턱 높은 경로당 무더위 쉼터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부산시 23만 원씩 냉방비 지원
회원제 등 이유로 접근성 한계
일률적 지정 대신 주민 중심으로

부산 서구 아미동의 한 어르신이 열악한 환경에서 무더위를 견디고 있다. 부산 서구 아미동의 한 어르신이 열악한 환경에서 무더위를 견디고 있다.

극한 폭염이 이어지면서 변변한 냉방시설도 없는 ‘기후 약자’, 그중에서도 노인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이들에겐 노인시설이 사실상 유일한 무더위 쉼터이지만, 시설 대다수가 회원제로 운영돼 이용하는 게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주민 중심의 소규모 무더위 쉼터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부산 서구 아미동. 〈부산일보〉 취재진과 (사)부산연탄은행은 1시간가량 아미동에 거주하는 고령층 20가구에 생수를 배달하는 봉사에 나섰다. 이날 부산에 올해 첫 폭염경보가 발효됐는데 주민들은 벌써 무더위에 녹초가 된 모양새였다. 집집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작은 바람이라도 들이고 싶은 간절함이 엿보였다. 열린 문 너머로 쥐 죽은 듯 잠자는 모습을 보니 애절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민 대부분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에어컨, 선풍기 등 냉방시설을 갖추기 힘든 기후 약자이지만 갈 곳은 마땅치 않다. 무더위 쉼터로 지정된 경로당은 그들에게 ‘그림의 떡’이다. 박귀덕(82) 씨는 “우리 동네에도 에어컨이 설치된 사랑방이 있지만 기존 회원 텃세 때문에 잘 가지 않는다”며 “경로당이 멀리 있는 경우도 많다. 거동이 불편해 잘 찾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재난안전포털에 따르면, 부산의 실내 무더위 쉼터 1265개 중 842개가 경로당 등 노인시설인 것으로 나타났다. 동주민센터, 은행 등 다른 실내 무더위 쉼터를 제외하면 부산의 무더위 쉼터 대부분은 사실상 노인시설인 셈이다.

부산시는 무더위 쉼터로 지정된 경로당에 여름철에는 23만 원씩 냉방비를 지원하면서 '누구나 무더위 쉼터를 이용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본 경로당의 문턱은 높았다. 먼저 고령층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인 탓에 일반 시민이 편하게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고령층이라 하더라도 노인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 평상시 회원제로 운영되는 경로당 특성 탓에 비회원인 일반 주민은 ‘눈칫밥’ 때문에 이용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노인에게 경로당 회원 등록은 꿈같은 소리다. 통상적으로 경로당 회원이 되려면 2만 원 내외의 입회비와 매달 5000원가량의 회비를 내야 한다. 누구에겐 적은 금액이지만, 어떤 이에겐 며칠 생활비다.

경로당 관계자도 회원이 아닌 일반 주민이 경로당에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양정2동 경로당의 성안원 회장은 “냉방비를 지원받는 만큼 누구나 무더위 쉼터를 이용할 수 있다고 안다”면서도 “실제로는 회원 말고 다른 주민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아파트 입주민이 아니면 접근조차 불가능한 무더위 쉼터도 있다. 〈부산일보〉 취재진이 31일 방문한 부산진구 양정동의 한 경로당은 아파트 내부에 있었는데, 1층 출입문을 통과하는 데에 입주민 전용 출입증이 필요했다. 이 경로당은 국민재난안전포털에는 무더위 쉼터로 버젓이 등록돼 있지만, 사실상 외부인이 이용하는 게 불가능한 셈이다.

이에 무더위 쉼터 지정을 지자체 중심이 아니라 주민 중심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일률적으로 경로당을 무더위 쉼터로 지정할 게 아니라 주민이 정말 자주 이용하는 곳에 냉방비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대 손지현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자체가 주민센터, 동사무소 등 무더위 쉼터로 지정한 곳은 애초에 공간의 목적이 달라 쉼터 역할을 하는 게 어렵다”며 “경로당 역시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일반 노인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통상 동네마다 어르신 5~10명이 자주 모이는 집이 여러 곳 있다”며 “지자체가 번거롭더라도 소규모 공간 이용 기록 등을 확인해 냉방비를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글·사진=김준현 기자 joon@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