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이 글은 쓸모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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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쓸모 유무와 존재에 대한 규범
등식으로 성립하는 관계 아냐
생명 그 자체로 존중 않는 인식
인간의 존엄성 훼손할 수 있어
물질적 효용만 추구하는 사회
죽음조차 편견과 차별로 대해

7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서이초 교사의 자살, 실종 해병대원의 사망, 신림동 ‘묻지 마’ 살인까지 한 달간 쏟아졌던 사건·사고와 여러 죽음은 충격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개별적인 사건들에서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7월의 비극들을 지나오며 막연하지만 공통적인 물음을 떠올렸다. ‘쓸모’에 관한 것이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신림동 흉기난동 범인의 진술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쓸모가 없다는 말을 통해 범인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임을 전하려 한 것 같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옹호될 수 없다. 그럼에도 쓸모의 부재와 존재의 부정, 그 사이 관계는 고민이 필요하다.


쓸모와 존재가 등호관계를 갖는다면 무언가는 쓸모 있을 때 존재할 수 있고 쓸모가 없을 때 존재할 수 없다. 과연 쓸모 있는 것만이 실재가능한 것인지 회의적이다. 삶이 오직 쓸모 있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이며, 현실에서는 쓸모없는 것들이 ‘예쁜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환영받고 있는가. 쓸모의 유무와 존재의 규범은 등식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쓸모와 존재는 자주 동등한 조건인 것처럼 혼동되어 여겨지곤 한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은 존재의 명분을 갖기 위하여 자신의 쓸모에 대해 타인에게, 사회에 끊임없는 증명을 보여야 할 것이다. 역으로 누군가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서도 상대에게 쓸모의 증명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왜곡은 사람을 그 생명 혹은 존재 자체로서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사용가치를 발휘하는 부품처럼 인식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

아마도 현대사회에서 논할 수 있는 가장 밀접한 쓸모는 물질적 효용과 맞닿는다. 돈을 벌거나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능력을 갖추어야 존재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신자유주의 가치관이 대표적이다. 사회적으로 생산에 기여함으로써 존재의 당위를 인정받고 또는 존재의 명분이 생산에 귀속되어 이를 추구할 때 비로소 쓸모 있는 무엇이 되는 길에는, 쓸모없는 것, 즉 비생산적인 것은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는 가치판단을 내포한다.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는 불필요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흔한 사례로, 어렸을 때 공부를 잘하면 인정받고 공부를 못하면 무시당하는 경험은 학생들에게 쓸모라는 가치를 주입시키고 그 결과 자존감을 위협한다. 나아가 취업에 성공하면 당당해지고 취업에 실패하면 숨어 지내는 청년들이 생겨난다. 친구를 사귈 때는 우정이라는 감정을 나누기 이전에 친구가 본인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부터 따져 보게 한다. 여성을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 바라보거나 어린이를 미래의 노동력으로 명명하며 입학연령을 건드렸던 시도들은 모두 존재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존재의 쓸모를 계산하는 일에 앞장섰던 결과다. 쓸모에 대한 집착이 만연하여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하다가 생을 포기하거나 남을 해치기까지 하는 사회는 얼마나 쓸모 있는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난달 많은 사람들이 상실의 아픔을 겪었지만 충분히 애도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애도 역시 쓸모의 가치 앞에서 조급한 마무리를 종용받기 때문이다. 누군가 세상을 떠난 후 슬픔으로 남겨진 자는 가족만이 아니다. 예컨대 서이초에 근무했던 고인의 동료 교사들은 누구보다 큰 충격과 공허함에 휩싸였을 것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가족관계가 아니라면 아무런 지원이 없고 또한 직장은 슬픔에서 빨리 헤어 나와 노동의 자리로 돌아오길 바란다. 관련하여 2019년 여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실렸던 인사관리 논문은 충분한 애도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조직에서 사별을 겪었을 때 동료에게 애도의 시간을 보장하고 업무복귀를 천천히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쓸모의 역설처럼 들린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에는 매일같이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시즈토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고인들과 일면식도 없는 시즈토의 애도는 전혀 쓸모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시즈토의 애도를 통해 소설은 수많은 죽음 앞에서 무슨 기준으로 어떤 고인은 동정받고 어떤 고인은 무시되는지 물으며 쓸모에 따라 죽음과 애도의 무게가 달라지는 편견과 모순을 보여 준다. 또한 잔혹한 사건일수록 가해자는 기억해도 피해자는 잊어버린다는 예리한 지적에서는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하려는 노력과 기록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가장 쓸모 있는 일인가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결코 쓸모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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