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국가 부도 걸고 ‘벼랑 끝 대치’ 반복하는 정치권 불신”

김형 기자 m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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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에 미 신용등급 하락

정치적 교착 반복으로 신뢰 하락
지출 증가로 재정적자 확대 우려
고령화 등 여파 추가 지출도 부담
미 정부 "경제 기초 튼튼" 반발

지난 5월 디폴트(채무불이행) 협상을 위해 만난 바이든(오른쪽)과 매카시. AFP연합뉴스 지난 5월 디폴트(채무불이행) 협상을 위해 만난 바이든(오른쪽)과 매카시. AFP연합뉴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1일(현지 시간)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한 데에는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와 재정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극한 대립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정부는 초고령사회를 코앞에 두고 예산을 사용할 곳은 증가하고 있으나 나랏빚이 증가하고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부채상환 능력이 있느냐고 의심을 받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회의 거버넌스(통치체제)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벼랑 끝 대립’ 탓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어 신뢰도 하락을 가속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매번 ‘국가 부도’ 직전 부채한도 합의

피치는 이날 미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배경을 설명하는 보고서에서 ‘거버넌스 악화’를 첫 번째 사유로 제시했다.

이는 피치가 지난 5월 미국을 ‘부정적 관찰대상’으로 지정하면서 내건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당시 피치는 부채한도 상향 협상 대치를 두고 “디폴트(채무불이행) 예상일이 빠르게 다가오는데도 정치적 당파성이 부채한도 상향·유예 등 문제 해결에 이르는 것을 막는 점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피치는 국가 부도 사태 위험을 내걸고 ‘벼랑 끝 대치’ 전술을 반복하는 정치권 행태를 보며 신용등급을 깎을 수 있다고 사전에 경고한 것이다.

피치는 지난 6월에는 미국에 대해 부정적 관찰대상 지위를 유지하며 “부채한도를 둘러싼 반복적인 정치적 교착 상태와 디폴트 예상일 직전까지의 지연은 재정과 부채 문제와 관련한 거버넌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재정적자가 근본 원인

신용등급 하락의 더욱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확대가 꼽힌다. 세수보다 재정 지출이 더 빨리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피치도 이번 보고서에서 연방정부의 세수는 줄었는데 각종 재정 지출은 늘고 있는 점을 재정적자 확대 요인으로 꼽았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국방 관련 지출이 늘어난 데다 올해 하반기부터 인프라 투자 관련 각종 재정 지출이 예정된 상태다. 더 큰 문제는 이자 비용 증가다.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나랏빚을 크게 늘린 상황에서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금리를 올려 이자 상환 부담이 이중으로 늘었다.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에 대한 경고는 미국의회예산국(CBO)에서도 나온 바 있다. CBO는 지난달 장기 예산 전망 보고서에서 2053년 미국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중이 10.0%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CBO는 특히 이자 비용 상승이 재정적자를 키울 것으로 전망했다.

■재정 지출 확대 부담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에 따른 추가적인 재정 악화 우려도 이번 등급 강등에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피치는 이날 보고서에서 CBO 분석 결과를 인용해 2033년까지 메디케어(고령자 의료보험)와 사회보장 지출이 GDP의 1.5%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피치는 “향후 10년간 금리 상승과 부채 증가로 인해 이자 상환 부담이 증가하고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상승으로 고령층에 대한 지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통계청에 따르면 미국은 2021년 현재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6.8%로 초고령사회에 다가서고 있다.

피치는 나아가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약화할 경우 정부의 자금 조달 유연성이 감소해 신용등급을 추가로 하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미국이 재정개혁을 통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거버넌스 악화 경향을 반전시킬 경우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할 요인이 된다고 피치는 평가했다.

■미 정부 강력 반발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이날 피치 결정에 대해 “자의적이며 오래된 데이터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미국 국채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유동자산이며 미국 경제의 기초는 튼튼하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피치의 이번 결정에 강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바이든 대통령은 세계 주요 경제권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회복세를 이끌고 있다”고 항변했다. 피치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춘 것은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학계에서도 피치의 이번 결정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의 부채비율 급증은 일어나지 않았고 거버넌스 부문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거시경제도 지난해보다 크게 개선됐다"고 지적했다.


김형 기자 m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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