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그리는 우리 삶의 범상치 않은 민화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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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시집 ‘민화’ 연작 65편
밥 먹는 것에 사람의 도 있다
곡절 쓴맛 불안을 살아내는 것
그게 사람 사는 맛을 겪는 일

성선경 시인은 “함께 늙어 가며 고생했다고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밥 먹고 술 먹는 게 도”라고 했다. 부산일보 DB 성선경 시인은 “함께 늙어 가며 고생했다고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밥 먹고 술 먹는 게 도”라고 했다. 부산일보 DB

시력 36년의 성선경은 다작의 시인이다.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의 다작은 옹골차다. 교직 명퇴 후 그의 삶은 오로지 시 쓰기에 골똘하게 바쳐지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삶의 범상함을 범상치 않게 포착한 민화를 그렸다. 그의 열네 번째 시집 <민화>(파란)는 묵은 맛의 ‘민화’ 연작 65편을 수록했다.

‘단디는 부적, 어머니가 내게 주신 부적, 집을 나설 때마다 꺼내주시는 부적’인데 이제는 ‘내가 내 아이들에게 붙여주는 부적’이 됐다. ‘그냥, 단디, 단디, 습관처럼 꺼내주는 부적, 평생을 가슴에 품고 다니다 이제야 효험을 느끼는 부적,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부적, 자자손손 대대로 내려갈 부적’(‘민화 45’). 많이 본 적 있는 ‘까치호랑이 민화’ 같은 것이 ‘단디 부적’이란다.

무릇 의식주를 나란히 들먹이지만 그중 가장 근본은 먹는 일이다. 천심도 민심도 목구멍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 ‘봄날엔 좋은 친구와/도다리 한 접시가 아삼륙/흩날리는 벚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새잎 돋는 소리를 듣는 재미/막걸리 한 사발이 아삼륙’이고, 또 ‘가을에는 국화꽃 향기 아래서/전어 한 접시가 아삼륙’이다. 그러면서 ‘함께 늙어 가며 고생했다/서로의 등을 두드리며/다시 잔 권하며’(‘민화 52’) 하는 것이다.

먹는 일의 조화는 참 여러 가지다. ‘참 얼척없데이 (중략)/당신이 끓여 준 김치찌개를 삼십 년이나 먹고 또 먹고/아직도 맛있다고 낄낄거리는 일 (중략)/삼십 년 전이나 똑같이 한 뚝배기의 된장찌개에/함께 숟가락 담그는 일, 참 얼척없데이’(‘민화 18’). 얼척없다, 는 어처구니없다, 는 뜻인데 이렇게 얼척없는 게 사는 일이다. 하기야 사람은 틈이 있어야 사람인데, 그 틈으로 숨을 쉬는 것이다. ‘사람은 술을 먹습니다./나중에 어떻게 될 값에라도/술을 먹어야 사람이지/때로는 실없는 농도 하고/헛돈도 퍽퍽 쓰면서/(중략)//나중에, 나중에는 어떻게 될 값에라도’.(‘민화 29’)

성선경의 열네 번째 시집 <민화>. 파란 제공 성선경의 열네 번째 시집 <민화>. 파란 제공

이런 곳에 사람의 길, 도가 있다. ‘도를 찾아 길 떠나지 마라/밥 먹고 술 먹는 게 도다/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밥 한술/거기에 반주 한잔/그게 도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극락이라 했거늘/(중략)/따뜻이 밥 먹고/술 먹는 게 그게 도다.’(‘민화 32’) 그의 시를 술술 읽어내리면 어쩔 수 없이 목구멍이 칼칼하다.

사람이 길을 이리저리 찾지만, 저마다의 길은 이미 있다. ‘붙잡아도 갈 사람은 제 길로 가고/밀쳐 내도 있을 사람은 곁에 있다/이건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것이 아니다/살다 보면 저절로 다 아는 수가 있다’(‘민화 6’). 우리에게 많은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늘 착각하지/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다고/그러나 알고 보면 삶은 일선(一線)’이다. 결국 ‘모든 부처가 일주문을 지나야만/그 광휘를 만날 수 있듯이/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하나뿐’(‘민화 42’)이다. 다만 그 일선의 길 위에서 ‘머뭇거리지 않으며/머뭇거리며’ 할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에게 오는 시간이 있고, 가는 시간이 있으며, 우리가 잡는 시간이 있으며, 우리가 잡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 ‘벚꽃이 피는 것처럼, 벚꽃이 지는 것처럼, 한때의 봄이 오고 있다, 그 한때의 봄이 가고 있다.’(‘민화 36’) 오는 것은 잡고 가는 것은 허허롭게 보내면 될 일이다.

우리 삶에는 ‘약간’이라는 미묘한 것이 있다. ‘약간’은 약간에 불과하지만 실은 우리 삶의 진한 백미다. ‘네게로 가는 기쁨 다 가지려거든 불안도 약간’, ‘좋은 그림을 그리려거든 여백도 약간, 아직도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있다면 헤어질 준비도 약간’(‘민화 56’).

그의 시 구절에 따르면 세상에 부는 바람은 늘 불길을 머금고, 인생에는 분명 ‘눈물을 짜내는 쓴맛’과 ‘안쪽이 펄펄 끓는 불안(不安)’이 있고, 사람 속에는 ‘늘 폭발을 예고하는 휴화산’이 있는 법이다. 이런 것이 사람이 겪는 사는 맛이고, 사람 사는 모양새다. ‘우리 사는 게/(중략)/다 그게 그것 같지만’ 볶아 조지고, 끓여 조지고, 구워 조지는 것이 있는 것이다(‘민화 43’). 사람들은 말한다. 사는 게 별것 없다고. 그렇다. 숱한 곡절과 사연, 불안과 휴화산, 눈물과 쓴맛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게 인생이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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