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생강나무 / 정우영(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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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시집 〈집이 떠나갔다〉(2005) 중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더 크게 품을 수 있다. 나무의 운명이 그러하다. 시에서 보인 ‘한곳에 서 있는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켜켜이 새겨두’고 있는 것이 그런 경우다. ‘생강나무’는 움직이지 않고도 ‘느린 시간을 걸을’ 수 있다.

역설은 차원을 넘고자 하는 의지다. 그 점에서 시인은 랭보의 말처럼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꿰뚫어보는 견자(見者)다. 진리를 추구하므로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드’는 놀라운 공감을, 다시 말해 우주적 영성을 획득할 수 있다. ‘지구의 여행자’에서 삼천대천세계의 수행자로 전화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생강나무’가 뿜고 있는 덕성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적 차원의 진실로 눈을 돌리게 한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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