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진영의 더 많은 투표 참여가 필요하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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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왜 실패하는가 / 벤 앤셀

SNS 영향 사회 양극화 심화
잘못된 정치 우리 미래 파괴
타협·협의의 길 포기 말아야

벤 앤셀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피습 사건을 민주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 폭력에 대한 우려를 잘 보여 주는 사례로 들었다. 부산일보DB 벤 앤셀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피습 사건을 민주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 폭력에 대한 우려를 잘 보여 주는 사례로 들었다. 부산일보DB

“내가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지면 미국 전체가 ‘피바다(bloodbath)’가 될 것이다.” 미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며칠 전 연설에서 한 이야기다. 트럼프는 또 불법 이민자들을 향해 “그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animal)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다 미국 정치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나 싶다. 올해는 세계 76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지면서 ‘슈퍼 선거의 해’로 불린다. 세계 인구의 무려 25%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다. 22대 총선 날짜도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웬만하면 가족끼리 정치 이야기는 최대한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전문가의 조언이 나오는 지경이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탓이다. 오늘날 좌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스트들은 상대방을 악마화해 모두 없어져야 할 존재인 것처럼 말한다. 늪에서 물을 완전히 빼자는 식이다. 만약 그렇게 특정 색을 빼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정치를 필요로 하면서도 정치를 혐오한다.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제목이 역설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정치가 왜 실패했는지 이해해야 비로소 정치가 성공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 수 있다. 촉망받는 젊은 정치학자 벤 앤셀은 극심한 양극화 속에서도 대부분이 동의하는 민주주의, 평등, 연대, 안전, 번영이라는 다섯 가지 지점에 주목했다. 문제는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목표가 대부분의 경우 불일치하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 지점에서 갈등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것을 각각의 ‘덫’이라고 표현한다. 그 불일치 안에서 타협과 협의의 길을 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지난 10년간 고생을 많이 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전제주의 정권은 강화됐고, 그리스·영국·미국 등 민주주의의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국가의 민주주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오늘날 정치적 양극화는 SNS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SNS가 자신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주장만을 접하게 만들어 ‘정보 사일로’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표현한 부분이 흥미롭다. 정보 사일로는 한 집단이 외부 집단과 교류하지 못하면서 정보가 마치 곡물처럼 내부에 갇히는 현상을 일컫는다.

민주주의는 이제 답이 아닌 시대가 된 것일까.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치도 성장하니 판단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처칠은 “민주주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선택지는 훨씬 더 나쁘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책에서 저자가 내린 현실적인 대안은 중도 진영의 더 많은 투표 참여다. 양측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극단적인 사람들이 정치판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우리처럼 공정에 민감한 사회도 드물다. 하지만 한국의 소득 불평등의 심화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빠른 수준이다. 저자는 심화하는 불평등에 대처하기 위해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부(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인 유권자들이 겁을 먹지 않는 수준에서 부유세를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엘리트 교육의 수혜자들이 그들의 지위를 전적으로 능력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자신에게 유리했던 환경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교육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고 엄중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관심이 많은 보편적 기본소득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흥미롭다.

잠시 정치를 외면할 수는 있어도 정치를 피해 달아날 수는 없다. 그러니 정치를 무조건 비난만 해서는 안 되겠다. 막스 베버는 정치를 두고 “딱딱한 판에 서서히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말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이런 불완전성은 모두를 연결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치는 우리를 미래의 꿈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다. 벤 앤셀 지음/박세연 옮김/한국경제신문/472쪽/2만 3000원.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 표지.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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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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