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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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젠더데스크

한국서 ‘정치’는 부정적인 느낌 있어
대화 주제로 올리지 않으려는 경향

22대 국회 후보자 등록 결과 발표
여성 14.16%로 턱없이 적은 비율

어느 한쪽이 과잉 대표되는 건 문제
대의 민주주의 기본 가치와 직결돼

얼마 전 전시 때문에 한국을 방문한 유명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갤러리를 비롯해 뮤지엄급 미술관에서 모셔갈 정도인 이 작가는 수십 년째 정치 사회 경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를 만나 처음으로 한 질문이 “당신의 작품은 항상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부담스럽지 않냐?“였다. 작가는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당황스러웠다.

작가는 “한국에선 정치적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나?”라고 반문했다. 결국 한국에서 그 표현은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과거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은 후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칭찬으로 느껴진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관심, 시대의 요구에 즉각 반응하고 그걸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찬사인 거 아닌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한국에서 ‘정치’ 혹은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심지어 청소년인 아들조차 협동 플레이 게임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이간질하는 플레이어를 “정치질한다”라고 비난하는 걸 들은 적 있다. 한국에서 확실히 ‘정치’라는 표현은 혐오스럽거나 대화 주제로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4월 10일 열리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문과 방송에선 한참 전부터 예비후보와 경선·공천 결과를 주요 뉴스로 올리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22일 22대 총선 후보 등록을 마감했다. 전국 254개 지역구에 699명의 후보가 등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후보 등록 결과를 바탕으로 각 언론에선 최고 경쟁률의 지역구, 연령별 분포, 지역별 경쟁률, 최연소와 최고령 후보 등 화제가 되는 정보들을 속속 전했다.

관련 뉴스 중 나의 눈길을 끈 정보는 후보자 성별 분포였다. 22대 총선 699명의 등록 후보 중 남성 후보가 600명으로 85.84%에 달했고 여성 후보는 99명으로 14.16%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여성 후보 30% 공천 할당제’를 지키기는커녕 여성 후보는 20%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1995년 부산일보에 입사한 후 나의 첫 출입처인 여성 분야의 주요 요구가 ‘여성 후보 30% 공천 할당제’였던 것이 떠올렸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 모습은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을 허락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난해 5월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정은 국회를 비롯해 모든 영역에 성별 균형 원칙 도입을 촉구하는 ‘남녀동수의 날’을 제정·발표했다. 매년 5월 25일은 ‘남녀동수의 날’이며 5월 23일부터 27일까지는 ‘남녀동수 주간’으로 정했다.

18, 19,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혜훈 한국여성의정 대표는 “남녀동수 실현은 단순히 여성의 권익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기본 가치를 구현해 내는 중요한 일이다. 남녀가 동등하게 대표돼야만 민주주의 본질인 그 가치가 지켜진다”고 밝혔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입법부인 국회뿐만 아니라 사법, 행정부까지 모든 지표에서 여성 비율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형편없이 저조하다. 21대 국회에서 여성의원은 19%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평균인 33.8%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순위로 따지면 37개국 중 34위다. 각국 여성의 정치참여 정도를 나타낸 국제의원연맹(IPU) 자료(2023년 기준)에 따르면, 180여 개국 중 한국의 순위는 120위이다. 우리나라 여성장관 비율은 공동 111위이며 조금 더 범위를 넓혀 대통령실을 비롯해 정부 부처 4개 기관 190명 핵심 고위공직자 중 여성은 7~8퍼센트에 불과하다. 사법부의 법원장 중 여성 법관 역시 한 자리수 비율에 그칠 뿐이다.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하면, 남녀동수제는 헛구호처럼 들릴 수도 있다. 여성들이 권리나 특혜를 조금 더 받겠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평등한 대의제가 구성되지 않고 한쪽(남성)은 과잉 대표, 또 다른 한쪽(여성)은 과소 대표 됐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남녀동수제는 실제로 30여 나라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의미 있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 선거 운동의 막이 올랐지만, 22대 국회의 얼굴이 벌써 예상된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고학력 남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국민의 얼굴을 닮지 않은 국회를 언제까지 봐야 할까.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을 고치기 위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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