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역사, 원양어업 60년] 1부 흔적찾기 18. 사모아 교민들
"이젠 삶의 터전 된 땅… 그래도 마음속에선 늘 고향 생각"
지난해 아메리칸 사모아 한인회에 의해 치러진 합동결혼식 기념 사진.운명처럼 배를 타고 아메리칸 사모아로 향한 원양선원들은, 또 한번 운명에 휩쓸리듯 낯선 땅 사모아에 정착을 했다. 배에서의 생활이라는 게 너무도 혹독해, 배 밖으로 나가면 그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육지에서의 삶이란 것도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큰 돈을 벌었지만 한 번의 사업으로 다 날려버리기도 하고, 때론 허리케인, 쓰나미가 삶을 휩쓸어버리기도 했다. 부모 형제,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을 하고 몇 년 내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벌써 30~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모 형제를 찾아 고국으로 가고 싶어도, 이제는 이곳에 정착한 자식과의 이별이 두려워 갈 수 없는 처지. 사모아 교민 1세대, 1.5세대의 삶을 들여다 봤다.
기병수 사모아 한인회 전 회장
22년 상어 지느러미 사업 목돈
납품업도 성공… 귀국 준비
최연소 기관장 출신 김성남 선장
9년간 원양어선 생활 끝에 정착
허리케인 땐 집 지붕 날아가기도
광부·간호사만큼 경제성장 기여
최근엔 중국이 입어권 거의 독점
■롤러코스터 같았던 삶, 기병수 회장
"이제 고향 순천으로 돌아가 조그마한 촌집에서 집사람이랑 여생 보내는 게 내 꿈이야."
한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를 가진 기병수(70) 아메리칸 사모아 한인회 전 회장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44년 전이야. 1973년. 그 때 당시 배를 타려면 돈을 상당히 많이 줘야 했어. 웃돈을 주고 겨우 배를 탔는데, 멀미를 말도 못하게 하는 거야. 여기 오는데 한달 동안 밥 먹은 게 두 세 끼가 전부였으니까. 근데 멀미를 암만 해도 사람이 죽지는 않더라고. 겨우 왔는데 돈이고 뭐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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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신축 개관 직후의 코리아하우스(한국관)의 모습 |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다시 몇 항차를 더 나갔고 또 한번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 선사의 전무가 그를 붙잡았다. "여기 남아 있으면 뭐든 해주겠다는 말에,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래 보란듯이, 돈을 많이 벌어서 돌아가야겠다.'"
전무의 말대로 육상에서 기지 관리를 하다 미국으로 가는 정기상선을 탔다. 하지만 여권도, 선원수첩도 없어 하선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운명의 땅 사모아로 돌아왔고 연안 고깃배를 탔지만, 그것도 지독한 멀미 때문에 얼마 못 가 그만뒀다. 그러다 우연찮게 상어 지느러미 중개업을 하게 됐다. 일본,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 사이에서 짧은 영어로 도움을 준 게 기회가 돼 미국 업체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이다. 수완이 좋아 보너스를 많이 받게 됐고, 70년대 중반 당시 돈으로 1년 만에 5000달러에 이르는 돈을 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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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화재로 코리아하우스(한국관)가 없어진 자리에 아메리칸 사모아 정부가 지은 체육관. |
이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22년여 동안 상어 지느러미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배에 선용품을 납품하는 일로도 성공을 했다. "1979년부터 1980년까지 거래가 정말 많을 때였는데 홍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 2000년 미국이 상어 지느러미 거래를 금지할 때까지 그는 계속 사업을 했다. 또 선원들을 대상으로 한 선물가게도 대박이 났다. 한마디로 그는 사업 운이 좋았다. 이렇게 번 돈을 고국의 부모, 형제들에게 상당 부분 보내 도움을 줬다.
"어느 순간, 내가 사모아에서 자식 낳고 돈도 벌고 사는데, 환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처음 올 때는 너희 나라 못 먹고 못 살아서 온 거 아니냐 하고 무시했지만 그 후로는 아니었어. '사모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자' 하고 다른 사업을 다 접고 볼링장 사업을 크게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 그 사이 첫 번째 부인과는 이혼하고 한국 부인과 재혼을 했지만 방광암 3기라는 위기가 찾아들었다. 다행히 현재는 수술을 해 잘 관리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행운아야. 근데 돈이라는 게 돌고 도는 거야. 스트레스 받으면 안 돼."
일본인으로부터 "너만큼 지독한 조선 사람은 처음 본다"는 말을 듣기도 했던 그는, 천천히 귀국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저기 다 다녀봐도, 한국만큼 좋은 나라가 없어."
■강렬한 허리케인의 기억, 김성남 선장
"스물셋에 최연소 기관장으로 배를 탔어. 당시 기관장 전도금(가불금)이 250만 원인가 그랬어. 1000원짜리 다발을 주는데, 마대에 넣었던 기억이 나. 007 가방에도 다 안 들어가더라고. 아버님한테 일부 드리고 남은 돈을 갖고 배를 탔지. 그 때 사모아에 처음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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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사모아의 상징과도 같은 파투(Fatu) 섬. 현지 차량 번호판에는 모두 이 섬 그림이 있다. |
김성남(60) 선장은 처음 3년 계약으로 배를 탔다. 그 후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둬야지 하면, 당시 선장이 붙잡아서 3년을 타고, 또 그만두려 하면 붙잡고, 그렇게 9년을 배를 탔다. 그러다 1989년 말 고려원양의 사모아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고 고려원양 경리였던 아내와는 1990년 1월에 결혼을 해 사모아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집사람이 아이를 낳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 집사람이 오래 진통을 하고 힘들어했는데 당시 여기 병원에 분만실이 6개인가 있었어. 근데 우리 집사람만 빼고 다들 쉽게 애를 낳는 거야. 산모가 하나 지나가고 좀 있으면 배가 푹 꺼져서 나오고, 또 들어가면 얼마 안 가 푹 꺼져서 나오고. 여기 사람들 지금도 애를 대여섯 명, 열 명 넘게도 낳는다니까." 그는 사모아에서는 정말 특이하게도 아들 하나만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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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사모아 인근에서 선장으로 활동 중인 최은호, 이충세, 양정용 선장(왼쪽부터). |
■지금도 사모아에서 활동하는 세 선장
운 좋게도, 사모아 출장 중이었던 지난달 19일 사모아에 들어와 있던 사모아 근해 조업 선장 3명을 파고파고(Pago Pago)항 근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원양어업의 역사를 되짚으려는 좋은 취지로 여기 와 줘서 고맙지 우리는. 선배님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원양어업의 길을 잘 닦았는데, 지금은 사양길에 접어드는 분위기라 송구스럽지. 정부에서도 관심이 없어 속상하고." 최은호(58) 선장은 1979년 2등 항해사로 한국수산개발공사의 배를 타고 사모아에 처음 왔다. "1979년에 배가 많았을 때 한국 배가 172척이 있는 걸 봤어. 통조림 공장 스타키스트와 밴 캠프 주변에 200척이 넘는 때도 있었지. 근데 오일쇼크 영향으로 많이 없어졌어. 지금 여기는 중국 배들이 많이 들어와. 중국이 남태평양 섬 나라에 투자를 엄청 하거든. 학교 지어주고, 도로 닦아주고. 근처 서사모아, 키리바시 등이 다 그래. 그러면서 입어권을 얻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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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사모아 기지에 입항한 선원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하역하던 모습. |
양정용(57) 선장은 1980년 고려원양 배를 타고 사모아에 도착했다. "몇 번이나 배를 안 타려고 했지. 선원수첩을 라이터로 태워버리고 육지에서 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 옛날에는 선장이라 하면 서로 시집 온다고 했는데 요즘은 그게 아니잖아. 가족이랑 떨어져 있어야 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누가 좋아해." 몇 번의 거듭된 결혼 실패 끝에 양 선장은 현재 사모아에서 혼자 살고 있다.
늦깎이로 2003년 사모아에 들어온 이충세(54) 선장은 늦게 사모아 여성과 결혼해 80여일 전 둘째를 얻었다. 그는 조선소에서 10년을 근무한 경력으로 포클랜드 오징어배에 전기사로 승선하게 됐고 이후 일본 어선의 기관장을 거쳐 현재 선장에 이르렀다. 그는 IMF 때 하던 사업이 망하면서 본격적으로 배를 타게 된 경우다. 이 선장은 취재진을 위해 사모아 전통음식인 우무(돌에 구운 통돼지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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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사모아 민속 춤. 일부 아메리칸 사모아 한인회 제공 |
이 밖에도 한국에서 취재진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먼저 연락을 해 온 교민도 있었다. 송경윤(70) 씨는 부산 영도에 아내와 아들 등 가족이 있고, 사모아에도 아내가 있다. "아들과 전화라도 하고 목소리라도 한 번 듣고 싶은데, 아들이 받아주질 않아. 그간 너무 고생을 해서 그렇겠지." 송 씨는 얄궂은 운명에 휩쓸려 지금에 이르른 삶을 되짚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아메리칸 사모아 한인회는 지난해 사모아 교민 1세대들의 평생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합동결혼식을 진행했다. 파고파고(아메리칸 사모아)/
글·사진=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