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의 열정과 테라코타의 고독, 영화가 된 두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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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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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에서 나란히 베일 벗은 김윤신·권진규의 삶
아흔 넘어서도 멈추지 않는 김윤신의 작업
기록과 재연으로 되살린 권진규의 예술혼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스틸컷. BIFF 제공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스틸컷. BIFF 제공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스틸컷. BIFF 제공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스틸컷. BIFF 제공

한 사람은 아흔을 넘은 지금도 전기톱으로 나무를 깎는다. 다른 한 사람은 테라코타와 건칠 작품을 남긴 채 떠났다. 한국 근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두 거장, 김윤신(1935년생)과 고(故) 권진규(1922~1973)가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매체 위에 자신들의 예술혼을 다시 새겼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에서는 두 거장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란히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됐다.

임선애 감독의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90분)와 민환기 감독의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119분)은 완성된 순간 멈춰버린 것으로 여겨지는 조각이 사실은 작가의 치열한 삶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스크린에서 입증한다.

지난 6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개막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김윤신(왼쪽) 작가와 임선애 감독. BIFF 제공 지난 6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개막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김윤신(왼쪽) 작가와 임선애 감독. BIFF 제공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오운 제공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오운 제공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오운 제공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오운 제공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중 김란(가운데) 씨가 관객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무대로 나와 이야기하고 있다. 김란 씨가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중 김란(가운데) 씨가 관객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무대로 나와 이야기하고 있다. 김란 씨가 "내가 가장 먼저 김윤신을 알아봤다. 김윤신이야말로 바로 내 작품"이라고 말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은영 기자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남미의 빈 묫자리를 조명하며 ‘프롤로그: 예고된 무덤’이라는 서늘한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는 곧이어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김윤신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도입부는 죽음이 아닌 작업 중인 ‘현재’로 관객을 이끈다.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난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은 49세에 교수직을 내려놓고 1984년 아르헨티나로 떠나 40년을 야생의 나무, 돌과 함께 살았다. 2024년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받았으며, 2024년 2월 영구 귀국 후 2026년에는 호암미술관에서 첫 대규모 대중 회고전을 개최했다. 영화는 그를 과거에 박제하지 않고 “더 오래, 더 많이 작업하기”만을 열망하는 현재의 예술가로 세운다.

이는 김윤신의 미술사적 위치를 새로 읽게 한다. 김윤신은 197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 왔다. 남미로 이주한 뒤에도 나무와 돌의 물성을 탐구하며 이 조형 언어를 확장했다. 완성작이나 명성이 아닌, 재료와 작가가 하나가 되는 과정 자체를 작업의 근거로 삼아온 것이다. 별도의 스케치 없이 나무를 며칠간 바라보다가, 재료와 자신이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비로소 전기톱을 든다. “잠시라도 쉬면 마음이 없어질까 봐” 아흔둘의 나이에도 작업을 쉬지 않고, 통나무 조각뿐 아니라 ‘회화-조각’이라는 독창적 장르를 선보이고 있다.

영화는 이 감각이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곁을 지켜준 이들과의 연대 위에서 지속됨을 보여준다. 연출을 맡은 임 감독은 창작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시기에 김윤신을 만나 “해답 같은 분이었다”고 고백한다. 감독은 한 거장의 개인 서사를 넘어 창작을 지탱해 온 여성들의 연대로 시선을 넓힌다.

특히 영화 속에서 빛나는 존재는 40년을 함께하며 작가의 곁을 지킨 동반자이자 제자, 수양딸이 된 김란 씨다. 어려운 시기 “배고파도 밥만 먹을 수 있으면 일을 하라”며 돕겠다고 했던 김란과의 관계는 창작의 지속이 일상을 지탱하는 돌봄과 연대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 감독은 에필로그의 끝맺지 못한 문장 ‘김윤신은 내일도’에 이 생명력을 향한 경의를 담아냈다. 그 미완의 문장은 결말을 다음 작업으로 열어놓는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스틸컷. BIFF 제공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스틸컷. BIFF 제공
지난 11일 오후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상영 후 열린 민환기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명필름 제공 지난 11일 오후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상영 후 열린 민환기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명필름 제공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민 감독의 영화는 테라코타와 건칠 기법으로 42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나 생전 국내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권진규의 삶을 따라간다. 그를 ‘비운의 천재’로 신화화하기보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예술가의 고독과 내면에 주목한다.

영화는 화려한 미사여구나 설명적 내레이션을 배제하고, 자막과 재연, 기록과 인터뷰를 통해 관객이 직접 작가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유도한다. 정치·사회 다큐를 주로 만들어 온 감독은 "조각을 잘 몰랐기에" 오히려 긴 시간 권진규의 삶과 시대적 공기를 공부했고, 조각이 시대를 담아내는 깊은 매체임을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난 권진규는 1948년 일본으로 건너가 1953년 무사시노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59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1973년 5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은 일본인 동반자를 연기한 배우의 독백으로 시작해 아카이브 사진과 유족(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 등)·연구자들의 입체적인 증언을 정교하게 엮어낸다. 동선동 작업실의 고요함과 말년 제자들과의 인연은 그가 남긴 작품들이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모순된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깊은 연민의 물리적 실체였음을 깨닫게 한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GV)에서 한 관객은 이 다큐멘터리의 형식이 권진규 예술의 지향과 맞닿아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GV에서 감독은 권진규를 당대의 집단성·추상성과 구별되는 '단독자로서의 개인'으로 바라보았다. 이 시선은 실제 권진규의 작업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1959년 일본에서 귀국한 권진규는 테라코타와 건칠을 주재료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일구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낸 형상과 자소상의 초점 없는 눈은 그가 추구한 정신성을 드러낸다.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모은 발 프로덕션 제공 지난 10일 오후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모은 발 프로덕션 제공
지난 9일 오전 CGV센텀시티 2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상영 후 열린 민환기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김은영 기자 지난 9일 오전 CGV센텀시티 2관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상영 후 열린 민환기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GV) 모습. 김은영 기자

■전시장 너머,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전시장

두 편의 다큐멘터리는 미술관에서의 공간적 경험과는 다른, 시간의 경험을 제공한다. 김윤신의 경우 카메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업, 땀, 호흡, 재료와의 몸싸움을 포착한다. 권진규의 경우 카메라는 남겨진 작품과 흩어진 기록 사이를 오가며, 관객의 상상과 사유로 부재한 작가의 시간을 재구성하게 한다. 이 차이는 재료의 차이만큼이나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다.

두 영화는 결국 같은 질문에 닿는다. 예술가란 무엇이며, 삶이라는 거친 원석에서 무엇을 깎아내고 무엇을 남기는가. 김윤신이 “105세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며 뿜어내는 현재의 에너지와, 권진규가 흙 속에 굳혀 낸 고독한 내면은 결국 이 질문의 양면이다. 부산의 스크린 위에서 만난 두 조각가의 치열한 기록은, 살아 있는 작가의 현재와 부재한 작가의 시간을 다시 보게 한다.

한편 ‘김윤신은…’ 영화는 2024년 백지숙 전 서울시립미술관장과 정순민 전 아르코극장장이 설립한 모은 발 프로덕션의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오래오래 살아남을 그들’의 첫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는 1953년 정전협정 이전에 태어난 여성 미술작가들의 생애와 작업을 30∼40대 영화인과 미술가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김윤신을 시작으로 윤석남(연출 권세정·권동현), 노원희(감독·촬영 이끼바위쿠르르), 김명희(감독 장우진)의 이야기를 차례로 다룰 예정이다.

‘권진규…’ 영화는 2023년 3월 영화제작사 명필름과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爐室)의 천사’(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를 개최한 서울시립미술관, 권진규기념사업회가 협약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서울시립미술관도 백지숙 관장이 재임 중이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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