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의 동지들37>-죽사 서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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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8일 밤.경남 통영의 송정택의 사랑방에는 서상호를 비롯,진평헌 양재원 권남선 김형기 배익조 등 18명이 은밀히 모였다.이들은 3월 13일 장날을 기해 남망산 공원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남망산 광부 4백50명과 도산면 광부 1백70명을 서상호 양재원 등 4명이 인솔해 출동키로 하고 최천 박중한 등은 태극기를 제작키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러나 10일 새벽 통영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훔쳐 만세운동때 뿌릴 선언문 1천2백매를 등사한 강세제 이학이 허장완 3명이 훔친 등사판을 다시 갖다 놓으려다 모두 검거돼 만세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진평헌 등 9명은 6개월~1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죽사 서상호는 1888년 7월25일 충무시(현 통영시) 명정동 349에서 천석꾼인 서희순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2살 되던 해에 결혼한 죽사는 서당을 다니다 3년동안 의성학원에서 신학문을 배운뒤 1908년 사촌형인 서상 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봉명학원에 입학한다.



죽사는 봉명학원 2학년때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온다.그 해 겨울 죽사는 동경 유학을 위해 아버지의 돈궤짝을 털어 사촌형과 함께 일본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한다.



아들의 가출로 병을 얻은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혼자 고향으로 돌아온 죽사는 정미소를 차려 사업에 발을 디디면서 당시 대구와 경주의 토착자본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서상일 최준 등과 교분을 맺는다.



죽사는 1913년경 서상일과,1916년경 윤상태와 연결된 것으로 보이며 서상일과는 곡물상을 하는 동업자로 인연을 맺은 후 달성친목회와 조선국권회복단과 관계를 맺게 된다.죽사는 상업적 거래 관계로 백산상회 지배인으로 있던 윤병호와도 접촉하고 있었다.



또 당시 조선국권회복단의 대구 마산 부산 등지의 연락을 담당한 신상태도 죽사와 계속 접촉하고 있었다.



죽사는 이처럼 곡물상을 거점으로 비밀결사 단원들과 상업거래를 내세워 계속 접촉하며 영남지역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비밀결사 조직에 깊이 관여한다.



죽사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상 과 함께 1915년 결성된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단원으로 가입한다.죽사는 상 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을 위해 1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다.



죽사의 통영 정미소는 이때부터 대동청년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연락거점으로 활용된다.당시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은 상업조직을 그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으며 부산의 백산상회,대구의 태궁상회,왜관의 향산상회,원산의 원흥상회,마산의 원동상회 등이 이들 단체의 연락사무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죽사는 1918년 서상일의 태궁상점 주식 인수문제로 2만원의 출금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3.1 독립운동후 서상일의 해외탈출 계획과 관련해서 독립운동자금의 제공을 요청받았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절했다고 한다.



죽사는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사건으로 경성 종로경찰서 형사대에 의해 체포돼 상 과 함께 구금된다.그러나 체포된 조선선국권회복단원 13명은 2년3개월에 걸쳐 고문을 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당하지만 단서가 드러나지 않아 석방된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죽사는 청년단체 결성과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 등에 힘을 기울인다.



통영지방의 3.1 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921년 7월 죽사을 비롯,서상 송정택 진평헌 등 당시 만세운동 결의자를 중심으로 이영재 임철규 등이 뜻을 모아 통영청년단을 결성한다.통영청년단 초대회장에는 박봉삼이 선출됐다.



통영청년단은 일경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실제 내용과는 다른 엉뚱한 연제를 내세워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으며 일경에 의해 강연회가 해산되거나 연사가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특히 무성영사기를 구입하고 악대를 조직하여 찜무와 애견 이라는 영화와 악대를 이끌고 전국을 누볐으며 1922년에는 극심한 수재를 입은 황해도 지방 주민을 돕기위해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통영청년단은 193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청년운동을 벌이던 죽사는 1924년 시대일보의 창간에 관여한다.사장은 최남선이었으며 죽사는 전무이사를 맡는다.최남선은 당시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 모금을 위해 죽사에게 자금 조달을 부탁했다고 한다.



시대일보는 그후 최남선이 발행권과 경영권을 신흥유사종교인 보천교에 넘기면서 사회적 비난속에 휴간하는 등 진통을 겪다 1926년 중외일보로 바뀐다.



중외일보는 1929년 이우식 안희제 등이 참여하면서 주식회사로 출범하지만 재정난으로 1930년 10월 휴간에 들어간다.



시대일보가 중외일보로 넘어가면서 죽사는 1925년 안희제와 최준의 추천으로 경남은행 취체역으로 가게 된다.경남지방 최초의 순수 민간은행인 경남은행은 1909년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저축주식회사가 모체다.은행 경영의 수완을 발휘한 죽사는 이듬해 전무취체역에 취임한다.



당시 경남은행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조달 창구였으며 죽사는 안희제에게 은밀히 독립자금을 대출해 주고 있었다.죽사는 당시 부산에 자주 내려가 독립지사들의 아지트였던 동래의 산해관에서 김범부와 만나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1933년 2월 죽사는 몽양 여운형이 만든 조선중앙일보의 전무를 맡아 다시 언론사업에 뛰어든다.이것을 인연으로 몽양과 죽사는 이후 10여년간 친구로 지내지만 결국 정치적 노선 차이로 결별한다.



죽사는 이후 고향에 학교설립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42년 통영공립중학교(현 통영중.고) 설립을 적극 돕는다.죽사는 당시 8천석의 거부였던 김덕보가 사망하자 상속자인 김재율을 설득해 학교설립을 하게 하고 이를 성사시킨 것이다.



죽사는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영에서 출마해 무소속으로 당선되며 자유당의 끈질긴 입당 교섭을 거부하고 임기를 마친다.



자유당 독재 붕괴이후 부산에서 참의원선거에 입후보해 낙선한 죽사는 서울 정능 자택에서 칩거생활 중 1964년 12월 2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죽사의 손자 서정욱씨(63.부산 동래구 사직동 시영아파트 23동 301호)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건이 날 때마다 일경을 매수해 빠져나오곤 했다고 들었다"며 "재판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서훈에서 제외되는 등 제대로 평가를 받지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춘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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