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를 찾아서] <31> 양정 정묘사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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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꽃 피고지면 벼가 익는다지요"

부산 양정 화지공원 정문도공 묘소 앞에 있는 배롱나무. 초록빛이 가득한 산자락에서 800년이 흐르도록 묘소를 지키는 한결같은 마음이 올해도 붉게, 평온하게 피어났다. 사진=조기수

"나무백일홍꽃 피는 때는 삼촌집도 가지 마라 했더란다."

배롱나무 꽃 핀 앞을 지나며 어머니는 지지리 어렵던 옛날 이야기를 그립게 꺼내시곤 했다. 요즘엔 배롱나무라는 예쁜 우리말 이름으로 많이 부르는데 예전에 어른들은 '나무백일홍 (木百日紅)'이라고들 불렀다. 한여름과 가을에 걸쳐 100일 동안이나 꽃이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늦봄 잎 틔워 후텁지근한 여름철

더위·가뭄·장마·태풍 이겨내며

가지 가득 붉은꽃 존재감 드러내


추위를 잘 타는 배롱나무는 남쪽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동네마다 있는 재실이나 사당, 서원, 절집 안에서 그리고 뒷산이나 논밭 사이 무덤가에서 주로 자랐다. 겨울을 보내고 다른 나무들이 차례로 잎을 낼 때도 죽은 듯 나목으로 있다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늦봄에 잎을 틔우고 여름이면 가지에 가득하도록 붉은 꽃을 펼친다.

배롱나무는 거리를 좀 떨어져서 보면 부챗살같이 넓게 퍼지는 가지 위 붉은 꽃물결이 한눈에 들어온다. 웃자란 풀들이 내뿜는 초록빛 숨마저 후텁지근한 세상 속에 붉음으로 선명하게 존재를 열고 서있는 배롱나무를 보고 있으면 눈이 시원해진다. 그러나 일없이 보는 사람에게나 그렇지 해가 길고 긴 여름 백날 동안, 여든여덟 번의 손길로 돌봐야 벼를 수확하는 농부들에게 나무백일홍꽃은 지겹기도 했겠다.

백일홍꽃이 피었다 지면 벼가 익는다는 말이 있다. 불볕더위와 가뭄과 긴 장마, 태풍을 이겨내야 잘 익어 단내 나는 벼이삭을 얻을 수 있는데, 그 힘들고 배고픈 기간 동안 피고 또 피는 꽃이 백일홍이다. 농기구를 냇도랑에 씻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길에도 지친 기색 없이 활활 핀 백일홍 꽃을 보면 "너 언제 지냐?"하고 눈 흘기기도 했을까.

배롱나무 꽃이 피어있는 석 달 열흘 동안 사람들 세상엔 온갖 일들이 생긴다. 설렘과 번뇌, 기쁨과 절망이 태풍처럼 마음을 휩쓸고 긴 여름날이 끝나갈 때 문득 고개를 들면 나무백일홍꽃이 고요하게 피어있다. 아무 일 없다며.

이렇게 배롱나무는 성품이나 외모가 속기(俗氣)가 없어 보인다. 어릴 때 나는 이 꽃이 강렬한 색인데도 밍숭밍숭하게만 보이고 좋은 줄 몰랐다. 변함없이 밍숭밍숭 내 곁에 있는 오랜 친구와 보내는 한심하고 사소한 짓거리들이 보석 같은 줄 알게 되니 배롱나무꽃, 날마다 똑같은 붉은 색이 빛나며 눈에 들어온다.

부산 양정동 화지산 아래 자리 잡은 화지공원 안 동래 정씨 시조인 정문도공의 묘지는 우리나라 대표적 명당자리로 손꼽힌다. 두 그루 배롱나무는 고려 중기에 무덤이 만들어질 때 무덤 양쪽에 심어져 800년 동안 묘를 지키며 살아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로 알려졌다. 조상을 기리고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나무라 하여 대대로 문중에서 잘 돌보아 왔다. 오래되어 원 줄기는 죽고 그 속에서 각각 네 개, 세 개의 줄기가 따로 난 나무처럼 뻗어 나와 지금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8월이 된 화지공원의 숲길에는 매미소리가 소나기 같다. 문중에서 잘 가꾼 숲 속 나무그늘 아래서 마을 노인들이 신선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묘보다 먼저 붉게 만개한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정확하게는 진분홍이라 할 것인데, 줄기에서 가지들은 섬세한 핏줄처럼 갈라지고 가지 끝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다. 커다란 쥘부채 모양의 배롱나무는 넓은 초록 잔디밭과 태양 사이에서 선연하게 붉다. 어느 곳에 자라든지 배롱나무에게서는 여성적인 따뜻한 품과 평온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무덤가에 심어진 배롱나무를 보면 죽은 이가 저세상에서 따뜻하고 평온하게 지내기를 비는 남은 자들의 애틋한 사랑이 보인다.

마침 바람이 불자 배롱나무의 긴 가지들이 부챗살처럼 느리게 흔들흔들 움직인다. 어릴 적 할머니가 누워있는 사람에게 느릿느릿 부채를 부쳐주던 정다운 모습이 떠오른다. 나무 아래는 그늘 때문에 잔디가 벗겨진 맨 땅이 황토 빛으로 둥글다. 상처 같은 여린 흙 위로 붉은 꽃잎들이 떨어져 흙을 덮고 꽃자리를 만들었다. 마음이 따라 물든다.

사실 배롱나무 꽃은 100일 동안 지지 않고 그대로 피어있는 것이 아니다. 무리진 꽃숭어리 중에서 하나가 지면 그 옆 하나가 피어나고 또 하나가 지고 또 옆의 꽃잎이 피어나고…. 그렇게 하여 100일 동안 배롱나무 꽃은 변함없이 피어있는 거다. 어느 한 꽃잎이라도 제 모습만 주인공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고 하나 된 아름다움을 위해 보이지 않게 피고 지는 공동체의 정신을 배롱나무는 보여준다. 이선형·시인 andl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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