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침 우키시마호에 8천 명 탔다" 日 외무성 문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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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 정부에 보낸 우키시마호 인양요청서 사본. 우키시마호폭침한국희생자추모협회 제공

7천 명이 넘게 승선했다는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은 있었지만 객관적인 문서가 없어 수천 명이 침몰사고 사망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광복 1호 귀국선 '우키시마(浮島)호'에 8천여 명이 타고 있었다는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우키시마호폭침한국희생자추모협회는 13일 "일본 외무성 기록문서인 '함정조난표류관계잡건'의 '우키시마호 인양요청서'에 탑승인원이 8천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한·일 정부의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우키시마호 인양요청서 사본을 공개했다.

추모협회가 공개한 문서는 우키시마호 침몰사고 5년 후인 1950년 2월 1일 사고지역인 일본 교토 마이즈루 거주 조선인들이 마이즈루 해상보안 부장에게 보낸 것으로, 김문길(부산외대 명예교수) 한일문화연구소장이 지난 6월 마이즈루 해군의 자료를 연구하던 일본인 연구원으로부터 전해 받았다.

사고 5년 후 '인양요청서' 기록
"승선자 명부엔 3천735명 탑승"
일본 정부 주장 뒤집는 증거


우키시마호는 광복 직후 징용자 등 한국인들을 태우고 처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던 선박으로, 1945년 8월 22일 밤 일본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를 출발해 이틀 뒤인 24일 오후 5시께 마이즈루 항 부근 해상에서 선체 밑부분의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승선자 명부에 기록된 3천735명만을 탑승자로 인정해 조선인 524명, 일본 해군 25명만이 사망자로 처리됐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인양요청서에는 '우키시마호는 전시 중 일본 제국주의자가 전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강제 징용한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해군항 시설공사에 사역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등 8천여 명을 태우고 오미나토 항을 출항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김 소장은 "당시 우키시마호 화물칸에만 4천 명 가까이 콩시루처럼 탔다는 증언이 있다"며 "당시 강제징용자들은 억압의 역사를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너나 할 것 없이 승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징용자들이 급여 책정 없이 일을 했다는 단서도 포착됐다. 인양요청서의 회신 격인 1950년 2월 15일 107호 문서에는 희생자들에 대한 배당금 측정으로 급여를 알 수 없어 1명당 2엔을 받았다고 정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 소장은 "급하게 급여를 책정한 것으로 보아 강제징용자들은 급여 책정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장병진 기자 joy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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