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아동 피해] ‘또 다른 수용시설’ 개금분교 기록 32년 만에 찾았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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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10년간 각종 인권유린이 벌어졌던 형제복지원 내에서 운영됐던 유일한 학교 시설인 개금분교의 기록이 부산 개금초등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본보가 확보한 입소자 신상기록카드 일부 이외에 형제복지원 관련 기록이 추가로 발견된 것이다. 개금분교 운영 기록은 참상이 일어났던 형제복지원 수용자를 확인하는 데 신상기록카드 이외에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증거자료다.

1984~1987년 4년간 운영

135명 졸업앨범·생활기록부

개금초등학교에 남아있어

아동 본적·생년월일 등 빼곡

추가 피해생존자 확인 ‘열쇠’

복지원 정당화 위해 분교 운영

폭력부터 사상교육까지 자행

기이하고 참혹했던 교육기관

“말이 학교지 또 다른 복지원”

실상 알았던 선생님들도 공범

■남아 있는 아동들의 기록

10일 본보 취재진이 부산남부교육지원청에 확인한 학생기록부, 졸업명부에 따르면 개금분교는 1984년부터 1987년까지 4년간 운영됐고 이중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에 걸쳐 135명이 졸업했다. 135명의 졸업앨범과 학생기록부는 현재 개금초등에 학적 기록으로 보존돼 있다. 지난해 일부 확인된 입소 신상기록카드 126명 중 아동이 거의 없었던 점에서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형제복지원 피해자 명단이 32년 만에 확보된 것이다. 당시 학생들의 본적과 생년월일 등이 빼곡히 기록된 만큼 생활기록부 등이 진상규명 과정에서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은 피해생존자 수백 명을 확인하는 ‘키’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복지연대 김경일 팀장은 “입소자 신상기록카드 이외에 가장 확실한 형태의 형제복지원 피해자 명단이다”며 “아동들의 경우 현재까지 살아계시는 분도 많이 계실 것으로 추정돼 더욱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기형적 형태의 개금분교

보존된 졸업앨범, 학생기록부를 보면 학교의 기형적인 운영행태를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학교의 운영형태는 일반적인 분교, 초등교의 형태와는 다른 비정상적인 운영이었다. 당시 형제복지원에 300명이 넘는 아동이 ‘아동소대’에 수용돼 있었지만, 학교에 다닌 학생은 매년 40명가량이 전부였다. 개금분교는 당시 형제복지원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개금분교를 다닌 학생은 모두 형제복지원 아동소대 원생들이었다.

학년 구분이 없는 학급 형태도 교육기관답지 못했던 개금분교의 모습을 설명한다. 아동소대 학생들의 나이대는 다 달랐지만, 개금분교에서는 학년 구분 없이 한 교실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수업을 받았다. 교육청은 개금초등의 분교를 형제복지원 내에 만든 뒤 1년에 1명의 교사를 분교에 파견했다. 형식적으로는 분교지만 사실상 교육청 허가를 받은 수용시설로 운영된 셈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에 따르면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한 원생들을 위해 야간 중학교도 운영되고 있었지만, 야간 중학교의 경우 정상 인가를 받은 교육 기관이 아니어서 현재 교육청에 당시 원생들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는 실정이다.

1984년 당시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개금분교를 1년간 다녔다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는 “대부분 소대에서 아이들은 작업을 했고 선발된 아이들만 분교로 갔다”며 “복지원에 아이들이 대거 몰리자 아마 원장 일가가 교육청에 지원금 등을 받고 복지원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분교를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현재 개금초교에 보존돼 있는 '형제원 생활기록부'. 현재 개금초교에 보존돼 있는 '형제원 생활기록부'.

■폭력부터 사상교육까지

“말이 학교였지, 또 다른 복지원이었다.”

당시 개금분교를 다녔던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기이하고 참혹했던 개금분교를 또렷이 기억한다. 1984년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수용된 최승우(50) 씨는 개금초등을 졸업하고 1년 뒤 복지원에 끌려왔다. 최 씨는 복지원에서 생활하던 중 개금분교에 담임으로 파견돼 왔던 교사를 우연히 복지원 내에서 만나게 됐다. 개금분교 파견교사가 자신의 개금초등 시절 담임교사였던 것이다. 당시 A 교사는 최 씨에게 “너 왜 여기에 있어?”라고 말한 뒤 그 이후 최 씨와 아는 체조차 하지 않았다. 강제노역이 이뤄지고 온갖 폭력과 학대가 자행됐음에도 자신을 기억하던 담임 교사는 최 씨를 애써 외면했다. 최 씨는 “파견 온 선생님들도 분명히 형제복지원의 참상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며 “개금초등을 멀쩡하게 다니던 내가 형제복지원에 있는데 묵인한 당시 선생님들도 공범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금분교 제2회 졸업생 김창호(가명·48) 씨는 학교에서 이뤄진 형제복지원 시설에 대한 교육을 끔찍한 기억으로 떠올린다. 한 교실에 빼곡히 모인 학생들은 국어, 수학(당시 산수) 등 교과목을 배우는 대신 선생님에게 형제복지원 시설의 의미에 대해 일장연설을 들었다. 아이들이 혹여나 주의가 산만하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면 담임 교사와 총무계장은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분교임에도 가장 무서운 존재는 복지원에서 감시 나온 ‘총무계장’이었다. 총무계장은 학교 내에서 담임교사보다 더 잔혹하게 아이들을 훈육했다. 아이들은 외부에서 손님이 올 때는 번듯하게 옷을 입고 교육을 받는 ‘모양’을 냈다.

김 씨는 “복지원의 운영을 정당화하기 위한 개금분교는 그야말로 보여 주기식 교육기관이었다”며 “당시 개금분교 아이들 중에는 덧셈, 뺄셈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한 것이 단면적으로 어떤 교육이 개금분교에서 이뤄졌는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금분교 기록이 향후 진상조사 과정에서 피해생존자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이라고 평가한다. 입소 신상기록카드의 경우 사망자도 많이 있지만, 생활기록부 등의 기록은 현재 드러나지 않은 피해생존자들이 대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증거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같은 분교의 운영형태가 당시 형제복지원과 국가 간의 부패한 ‘연결고리’중 하나인 만큼, 학교 운영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 역시 필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

여준민 형제복지원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개금분교 기록은 당시 수백 명의 아이들의 학습권이 침해된 또 다른 형태의 학대 기록이다”며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을 통해 당시 수용시설에서 이뤄진 위법적인 교육기관 운영을 낱낱이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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