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⑱ 분유와 우량아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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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아 선발대회가 퍼뜨린 “모유보다 분유가 낫다”는 신화

1959년 4월 4일 자 부산일보 3면 듀멕스 분유 광고. 1959년 4월 4일 자 부산일보 3면 듀멕스 분유 광고.

1959년 4월 4일 자 부산일보 3면에 듀멕쓰 분유가 “감옥이 없는 정말국(丁抹國·덴마크) 제품”이라는 광고를 냈다. 감옥과 분유의 상관관계를 딱히 찾긴 어렵지만, 굳이 해석하면 그만큼 좋은 환경에서 만든 제품임을 강조한 의도로 읽힌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구호물자로 들어온 뒤 분유는 엄마 젖보다 월등히 좋은 마법의 가루로 자리 잡았다. 1961년 모리나가 유업의 우두표 분유는 “모유를 능가하는 풍부한 영양가!”라는 광고 카피 아래 “귀아의 체중을 배로 늘려준다”고 선전했고, 1959년 비락(1963년 설립해 현재 부산에 본사를 둔 ㈜비락과는 무관한 듯)은 “모유보다 영양가가 많다”는 걸 장점으로 내세웠다.


남양유업의 제3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입상자 발표 광고. 1973년 5월 4일 자 부산일보 1면. 남양유업의 제3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입상자 발표 광고. 1973년 5월 4일 자 부산일보 1면.
1974년 5월 6일 자 부산일보 8면에 실린 남양유업의 제4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입상자 안내 광고. 1974년 5월 6일 자 부산일보 8면에 실린 남양유업의 제4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입상자 안내 광고.

분유 먹고 자란 통통한 아기가 건강하다는 믿음은 우량아 선발대회를 통해 더 공고해졌다. 분유 하면 연관검색어로 떠오를 법한 게 우량아 선발대회이니 말이다. 1974년 5월 6일 자 부산일보 8면의 ‘제4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입상자 발표’ 광고엔 긴 탁자 위에 엄마의 부축으로 겨우 서 있는 아기와 가운 입은 의사가 영양 상태를 살펴보는 전형적인 심사 장면이 실렸다. MBC 문화방송이 주관하고 남양유업이 후원한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1971년 첫 대회에 1830명이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1983년 13회 대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연인원 2만여 명이나 참가하는 기록을 남겼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커다란 메달을 걸고 서 있는 우량아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린 1975년 남양유업 광고처럼 주인공인 아기가 행복한 대회라기보다 포동포동 살찐 아기를 소망하는 어른을 위한 대회였다. 건강이 체중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관념이 익숙하던 때였다.


남양유업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뽑혀 메달을 목에 걸고 서 있는 우량아. 1975년 6월 14일 자 부산일보 2면. 남양유업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뽑혀 메달을 목에 걸고 서 있는 우량아. 1975년 6월 14일 자 부산일보 2면.

방송사에서 행사를 개최한 바람에 1970년대 우량아 선발대회가 널리 알려졌지만, 우량아 선발대회의 연원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 중반부터 ‘아동예찬’ ‘유아건강심사회’ 따위의 이름으로 열렸고, 해방 뒤에도 각 지방자치단체 주최로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렸다. “자랑스런 80대 1”이란 제목의 1965년 부산일보 기사를 보면 제20회 부산시 최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무게 9.12㎏ 키 67㎝의 영도 사는 정 모(5개월)군이 80명의 어린이 중에서 1등으로 뽑혀 5월 5일 어린이날에 표창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와 해방 직후부터 부산서도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금 50만 원을 내건 비락의 우량아 선발대회 알림 광고. 1958년 3월 14일 자 부산일보 4면. 상금 50만 원을 내건 비락의 우량아 선발대회 알림 광고. 1958년 3월 14일 자 부산일보 4면.

우량아 선발대회를 자사 제품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한 분유 회사는 남양유업 이전에도 많았다. 먼저 치고 나온 건 비락이다. 1960년 4월 27일 ‘제5회 비락 우량아 선발’ 광고로 미뤄 짐작하면 1956년부터 선발대회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58년 3월 14일 자 부산일보 4면에 낸 광고에서 “비락으로 양육한 최우량아에게 상금 30만 원, 이 아이에게 비락을 추천한 분에게 상금 10만 원, 이 아이에게 비락을 판매한 점포에 상품 10만 원을 주겠다”며 상금 50만 원을 내건 우량아 선발대회 참여를 독려했다. 그해 5월 27일 자 부산일보 1면엔 비락을 먹고 수석 우량아로 당선됐다는 15명의 아기 사진과 함께 “비락만 먹으면 허약아라도 우량아가 된다”는 광고를 실었다. 일찌감치 비락 분유를 먹여 우량아 선발대회를 준비하라는 독려 광고도 잇따라 게재했다. 1959년 10월 비락은 우량아 누드 사진과 함께 “무슨 우유를 먹고 이렇게 통통하게 살이 쪘을까?”라는 광고를, 1959년 11월 “상금 100만 원 비락우량아 명년(내년) 5월에 선발하오니 지금부터 비락을 먹여 귀아를 우량아로 당선시키십시오”라는 광고를 내며 판촉에 열을 올렸다.


제4회 비락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뽑힌 최우량아. 1959년 10월 8일 자 부산일보 1면. 제4회 비락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뽑힌 최우량아. 1959년 10월 8일 자 부산일보 1면.

자사 분유를 먹여 우량아로 선발됐다는 광고는 줄기차게 실렸다. 비락은 1960년엔 “올해 우유 먹은 우량아의 88%가 비락을 먹고 당선됐다”고, 1961년엔 “올해 서울서 우량아로 당선된 인공영양아 49명 중 42명이 비락을 먹고 당선됐다”고 선전했다. 1962년엔 “다른 우유보다 가격은 5할이나 싸면서도 우량아는 9배나 당선되는 비락”이라며 “산타클로스의 우유”라고 자화자찬했다. 우량아 배출 소식을 전하는 광고를 낸 건 비락뿐만 아니었다. 1965년 비만(Viman)을 시판하던 대한사이다는 “금년도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선된 최다수 어린이(75%)가 아이 우유 비만을 애용한 어린이였다”고 자랑했다. 비락과 상표권 분쟁을 겪은 뒤 베비락에서 이름을 바꾼 메디락은 1965년 “보건 관계 당국 주최 우량아 선발에 제1위”라며 “메디락 우유를 애용하면 우량아가 된다”고 광고했다. 다들 자사 분유를 먹인 아기가 우량아로 선발됐다고 하니 소비자로선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산타클로스의 우유"라고 자찬한 비락 광고. 1962년 11월 21일 자 부산일보 5면.
비만을 먹고 자란 아기가 우량아로 가장 많이 뽑혔다고 선전한 1965년 7월 28일 자 부산일보 1면 광고. 비만을 먹고 자란 아기가 우량아로 가장 많이 뽑혔다고 선전한 1965년 7월 28일 자 부산일보 1면 광고.
메디락을 먹은 아기가 우량아 선발 1위를 했다고 선전한 1965년 7월 30일 자 부산일보 3면 광고. 메디락을 먹은 아기가 우량아 선발 1위를 했다고 선전한 1965년 7월 30일 자 부산일보 3면 광고.

우량아 만들기로 시작된 분유광고 전쟁은 한참 뒤 상호비방전으로 확전됐다. 1988년 남양분유가 낸 “조제분유 시장점유율 79.98%”라는 광고에 맞서 매일유업이 날조됐다고 반박하는 광고를 실은 것이 시작이었다. 1991년 양잿물 분유 논란을 제기한 파스퇴르 유업까지 뛰어들면서 법정 분쟁으로 이어져 한동안 분유제조업체들이 분유광고 중단에 합의하기까지 했다. 그 뒤에도 1995년 햅쌀 함량 논란과 고름우유 논란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광고전은 계속됐다.


남양유업의 시장점유율 광고가 허위라고 주장한 매일유업. 1988년 3월 15일 자 부산일보 3면. 남양유업의 시장점유율 광고가 허위라고 주장한 매일유업. 1988년 3월 15일 자 부산일보 3면.
시장점유율 광고가 과장이 아니라고 반박한 남양유업 광고. 1988년 3월 23일 자 부산일보 12면. 시장점유율 광고가 과장이 아니라고 반박한 남양유업 광고. 1988년 3월 23일 자 부산일보 12면.

양잿물 분유 논란을 제기한 파스퇴르의 광고가 허위였다고 주장한 남양유업 광고. 1991년 1월 14일 자 부산일보 1면. 양잿물 분유 논란을 제기한 파스퇴르의 광고가 허위였다고 주장한 남양유업 광고. 1991년 1월 14일 자 부산일보 1면.

1991년 1월 14일 자 부산일보 1면에 남양유업의 광고가 실리자 바로 그날 파스퇴르도 3면에 이를 반박하는 광고를 실었다. 1991년 1월 14일 자 부산일보 1면에 남양유업의 광고가 실리자 바로 그날 파스퇴르도 3면에 이를 반박하는 광고를 실었다.

1995년 모유만 먹고 자란 아기를 대상으로 한 모유 수유아 선발대회가 대한간호협회 주최로 열렸다. 예선이 진행되는 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 젖을 물려야 하는 조건이 달렸다고 한다. 분유 회사들도 분유가 모유보다 좋다는 주장 대신 “엄마젖에 가까운”이란 카피를 쓰기 시작했다. 아기의 건강이 포동포동 살찐 몸으로 표현된다는 등식도 옛말이 됐다. 길고 치열했던 분유광고 전쟁에서 모유보다 분유를 먹이면 아기가 더 건강하게 성장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고쳐지고, 아기에겐 엄마 젖이 가장 좋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나 할까.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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