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실태조사 마무리] 국가 책임 확인은 ‘성과’, 사망 실태·처리는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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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소년 원생들이 식당 앞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1986년 형제복지원이 보낸 15세 권 모 군의 사체보관의뢰서. 사망진단서와 사망일자·연고 여부가 다르고 보관 이유도 의문이라고 연구팀은 지적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동아대 산학협력단 제공

1987년 ‘한국판 아우슈비츠’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지 33년. 부산시의 첫 공식 조사(부산일보 지난 27일 자 11면 보도)를 통해 사건의 피해 실태와 국가의 책임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출범을 앞둔 21대 국회가 이번 조사의 성과와 한계를 토대로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위한 법 개정에 나서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다.



피해자 수용·운영, 수사·재판
부산시·안기부 등 기관 관여 확인
박인근 불구속 수사도 거듭 건의
사체 매매 의혹은 증언 엇갈려
21대 국회 ‘과거사법’ 개정 나서야



■형제복지원 사건은 ‘국가 범죄’다

이번 실태 조사는 형제복지원의 피해자 수용과 운영, 수사·재판 과정에 이르는 전 과정에 국가가 책임 있다는 것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특히 국가기록원의 ‘대외비’ 문건과 부산시 기록관에서 찾은 자료에는 1987년 사건 발생 후 부산시가 축소·은폐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당시 김용원 검사의 인지로 대대적 수사가 시작된 1월 16일, 부산시는 형제복지원의 강제노역을 확인한 ‘사건일지’를 작성했다. 그런데도 당시 김주호 부산시장은 구속된 박인근 형제복지원의 석방을 김 검사와 보사부장관에게 건의했다.

이어 1월 19일부터 시 주도로 ‘관계기관대책협의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수사 주체인 부산지검 검사장과 부산시경 국장, 정보기관인 안기부와 501부대, 교육감, 민정당 사무국장 등 최고위급 관료들이 모두 참석했다. 부산시는 다시 박 원장의 불구속 수사를 건의했고, 형제복지원에 임시지원관리단을 파견하기 위한 회의에는 사건의 당사자로 불구속 입건 상태였던 박 원장의 아들을 참석시키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내 개금분교 학생의 규모(220명)와 명단도 이번 조사에서 부산시교육청을 통해 새롭게 확인한 자료다. 형제복지원은 문교부에 원내 아동을 위한 분교 설치를 건의했는데, 부산 동부교육청 역시 “선량한 학생들까지 나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문제아동”이라면서 부당한 분리 교육에 동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에 대해 교육 당국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밝힌 것과 밝히지 못한 것

사망자의 실태와 사망자 처리 과정은 이번 조사에도 불구하고 의혹이 남아 있다. 유가족 심층면접 조사에서 언급된 피해자의 이름이 부산시의 수용자 사망처리 지침 공문에는 없을 정도로 사망자 수치 자체가 일단 명확하지 않다. 사망자 처리 절차도 추가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다.

형제복지원 자료에서는 ‘연고자 인계’로 기록된 사망자가 부산시가 보관한 사망진단서에는 무연고자로 기록돼 있는 경우도 발견됐다. 시체 매매 의혹은 당시 신민당 조사보고서에도 언급됐는데, 연구팀이 조사한 당시 의과대생이던 의사 2명의 증언도 엇갈렸다. 한 명은 “해부용 시체는 경찰이 인계한 행려병자들인데 당시 선배들로부터 형제복지원으로부터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한 명은 “1990년 전까지는 모든 해부학 실습용 사체는 무연고자, 행려병자들”이라고 하면서도 시체 매매설에 대한 소문은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박인근 원장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과 그 행방도 조사 권한의 한계로 실체에 다가가지 못했다. 최근에는 동부산대학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재정 기여자가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느헤미야 법인 전 대표로 확인되면서 형제복지원 청산 과정의 셀프·헐값 매각 논란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박민성 부산시의원은 “박인근 원장 일가의 재산 축적 과정은 향후 환수를 위해서 추가 진상규명이 꼭 필요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21대 국회는 응답하라

국가 차원의 조사를 위해 필요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법)’은 국회 통과가 무산된 상태다. 사회복지연대는 29일 성명을 내고 “국회가 과거사법을 통과시켜 권한 있는 조사에 나섰다면 관계자 소환은 물론 각종 문서고 자료를 적법하게 조사하고 고통의 세월을 보냈을 피해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했을 것”이라면서 “이번 21대 총선을 통한 슈퍼 여당의 탄생을 계기로 정부 여당은 국민들을 대표하는 권한으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도록 조속히 법 개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원, 시장처럼 높은 사람들이 형제복지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형제복지원에 있을 때 높은 사람들이 오면 옷을 입혔다가 다시 빼앗아 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10살 때 극장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가 8년 동안 형제복지원에서 갖은 노역을 했던 A(57) 씨는 심층면접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돌아온 집은 형제복지원에서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였다. 그의 바람은 “그저 억울하고 아까운 시절들이 있었다는 것,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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