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대구 떼 따라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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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오치 도시유키

미국 매사추세츠주 의회당에 걸려 있는 ‘자유정신의 상징’ 조형물인 대구 상. 사람과나무사이 제공
네덜란드 어부들이 청어를 말리는 상황을 묘사한 그림. 사람과나무사이 제공
유럽사와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꾼 물고기가 청어와 대구라니!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는 13~17세기에 청어와 대구가 유럽 국가들의 부의 원천이자 중요한 전략 자원이었으며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였음을 전하는 책이다.

우선 인간의 성욕을 억제하기 위한 청어가 역설적으로 경제적 욕망을 자극하며 세계사를 바꾼 내용이 흥미로웠다. 그 연유를 찾기 위해 책장을 숨 가쁘게 넘겨야 했다.

13~17세기 ‘청어 떼’ 이동 경로
유럽 국가 경제적 패권으로 이어져
‘대구’는 신대륙 개척의 첨병 역할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는 육류를 ‘뜨거운 고기’라 하여 먹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인간의 마음속에 성욕이 불같이 일어나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연장선에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육류를 섭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 년 중 절반이나 되는 기간을 ‘단식일’로 정해 엄격히 시행했다.

하지만 단식일에도 적은 양이나마 뭔가를 반드시 먹어야 했다.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생선이었다. 생선은 ‘차가운 고기’라 하여 성욕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단식일은 ‘고기를 먹지 않는 날’에서 ‘생선을 적극적으로 먹는 날’인 ‘피시 데이(Fish Day)’로 바뀌었다.

중세 기독교가 만든 ‘피시 데이’ 관습은 거대한 시장을 창출하고 경제적 패권으로 이어졌다. ‘피시 데이’의 맨 처음 최대 수혜자는 발트해 연안 도시의 상인들이었다. 13세기 초반 무렵 발트해 연안의 도시 뤼베크 근해에서 어부들이 거대한 청어 떼를 발견했다. 곧이어 인근 도시 어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청어잡이에 나섰고 청어 무역이 활발히 이뤄졌다. 청어 시장 규모가 급속히 커짐에 따라 발트해 연안 도시의 상인들이 더 큰 이익을 위해 동맹을 결성했다. 1241년 뤼베크와 함부르크 간 동맹 결성이 시초였는데 이는 유명한 한자동맹의 원류가 됐다. 한자동맹은 수십 개의 도시가 참여하는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청어 무역을 독점했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한자동맹은 유럽의 경제적 패권을 장악했으며 그 패권은 2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한자동맹의 경제적 패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결정적 원인은 청어 떼가 갑작스럽게 산란 장소와 회유 경로를 발트해에서 북해로 바꾼 데 있었다. 이 작지만 큰 변화 하나로 한자동맹은 급격히 쇠퇴했다. 그 바통을 북해 연안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이어받았다. 이로써 그전까지 강대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며 존재감 없던 나라 네덜란드가 족쇄를 벗어던지고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다. 네덜란드는 15세기 청어 어업 육성정책을 통해 ‘소금에 절인 청어’ 주요 공급기지로 떠오르면서 한자동맹 도시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초 한자동맹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독일과 발트해 연안 시장까지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청어를 중심으로 유럽 최대 어업 강국이 됐다. 유통과 금융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17세기 ‘헤게모니 국가’로 발돋움해 전 세계를 제패했다.

반면 대구는 신항로 개척시대라는 거대한 시대 변화와 맞물리며 신대륙까지 영향을 확장했다. 대구는 미지의 땅 아메리카대륙을 구세계 시스템으로 편입시키는 첨병 역할을 했다. 대구도 청어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요청에 부응해 주요 식량 공급원이자 핵심 상품으로 탄생했다.

대구를 소금에 절여 햇볕에 바짝 말리면 5년은 거뜬히 보관할 수 있었다. 이른바 ‘염장 대구’는 적도를 지나도 상하지 않은 귀중한 식량으로 신대륙과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먼 거리 항해에 필수품이었다.

1496년 3월 베네치아 시민이었던 존 캐벗은 헨리 7세에게 특허를 얻어 브리스틀에서 서쪽을 향해 출항했다. 그는 보석과 향신료를 얻기 위해 갔는데, 뉴펀들랜드섬의 보나비스타 항으로 추정되는 곳에 상륙했다. 그곳에는 보석과 향신료 대신 거대한 대구 떼가 있었다. 캐나다 동부지역에서 뉴펀들랜드섬에 이르는 광대한 해역은 구세계를 향한 중요한 대구 공급지로 자리매김했다. 대구는 유럽인이 그 지역에 식민지를 세울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대구는 또 미국이 대영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자유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오치 도시유키 지음/서수지 옮김/사람과나무사이/312쪽/1만 7000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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